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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文鄕 경북, 문학관을 찾아 떠나는 여행 .5] 영양 ‘지훈 문학관’

2016-11-22

중정을 지나 한지문 조심스레 여니 눈앞에 ‘승무’가 쏟아진다

20161122
2007년 개관한 지훈문학관은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한옥 건물로 지어졌다. 입구에 걸려 있는 ‘지훈문학관(芝薰文學館)’ 현판은 부인 김난희 여사가 썼다고 한다.
20161122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삶과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지훈문학관’. 소년시절 즐겨 읽었던 책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시대를 고민한 작품까지, 시인의 전 생애가 한 편의 전기처럼 펼쳐진다. 문학관에서는 시인이 평소 썼던 문갑과 가방, 30대 중반에 쓴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세상을 뜨기 6~7년 전부터 애용했다는 담배 파이프와 안경 등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길에서 아주 멋진 숲을 만나면, 그 숲에 먼저 정신을 뺏기지 말고, 그 너머에 어마어마한 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숲은 자신의 매력으로 이방인을 홀리면서 숨겨둔 귀중한 것을 지키는 법이다. 그러니 숲을 만나면 그 너머를 예감하는 성급한 웃음을 지어도 좋다. 그러면 숲은 허락처럼 활짝 열려 하늘 넓은 땅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위압적이지도 소소하지도 않은 온건한 세 개의 봉우리 아래로 검은 광택의 기와들이 기품 있게 펼쳐져 있는 잘생긴 마을이 있다. 그곳이 영양의 주실 마을이다.

#1.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작품세계가 담긴 문학관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 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일제시대 친일 문학과 사상 전환의 강요에 붓을 꺾고 향한 곳도 이곳이었다. 여기에 그의 문학관이 있다. 세 개의 봉우리 중 오른쪽 봉우리 아래에 위치한 정면 열두 칸의 긴 한옥. 건물은 마을의 오른쪽 끝자락에서 취락의 오래된 실루엣을 이어 동리를 확장시키는 모양새로 자리한다.

지훈문학관은 2007년 5월 개관했다. 단층으로 지어진 ‘ㅁ’자 평면의 목조 기와집이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이다. 입구에 걸려 있는 ‘지훈문학관(芝薰文學館)’ 현판은 부인 김난희 여사가 쓴 것이라 한다. 들어서면, 중정이다. 텅 비어 환한 적막을 뚫고, 팽팽하게 한지 발린 문을 조심스레 연다. 조지훈의 대표적인 시 ‘승무’가 쏟아진다. 와락 반가워 화색이 뜨거워진다. 내부와 외부 빛의 산란 속에 시인의 흉상이 돋아난다. 꼭 다문 입매에 굵은 테 안경을 쓴 모습이다. 큰 키에, 두루마기를 입고, 단장을 짚고, 하늘을 쳐다보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가 떠오른다.


지훈 문학관
2007년 5월 개관한 단층 목조 기와집
문학관 현판은 아내 김난희 여사가 써
생애 망라한 전시물 傳記처럼 펼쳐져

시인 조지훈
1920년 주실마을 출생…본명은 동탁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 펼친 학자
‘승무’‘낙화’‘다부원에서’ 등 대표작



문학관은 먼저 그의 소년시절로 우리를 데려간다. 소년이 읽었다는 ‘피터 팬’ ‘파랑새’ ‘행복한 왕자’ 등의 동화들이 놓여 있다. 책 읽던 소년은 9세 때부터 글을 썼고, 그의 형 세림과 함께 마을 소년들의 모임인 ‘꽃탑회’를 조직해 동인지 ‘꽃탑’을 펴내기도 했다. 이어지는 청록시절, ‘문장’지에 추천을 받았던 20대와, 고문과, 절필과, 광복과, 청록집 관련 자료들에서 문학 소년은 문학 청년으로 순식간에 커져 있다.

곧이어 전쟁의 시편들, 시와 산문과 학술연구들, 추상같은 비평들과 선언들 속에서 너무 큰 사람으로 서있는 그를 본다. 그리고 커다란 벽에서 ‘지조론’을 마주한다. 1950년 말, 과거의 친일파들은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 나왔고, 지도자들은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지조론’은 그러한 세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한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이기도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하루아침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아리다. 전 시대를 관통하는 쓰라림이다.

이제 그의 유품들이 있다. 평소 썼던 문갑과 가방, 30대 중반에 쓴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다는 부채, 외출할 때 즐겨 입었던 외투와 삼베 바지, 그리고 세상을 뜨기 6~7년 전부터 애용했다는 담배 파이프와 안경 등이 차갑게 놓여 있다. 시인의 전기 한 권을 읽은 듯한 시간이다. 책 마지막의 친절한 첨부처럼, 하나의 벽에 그 생의 조각들이 100여장의 사진으로 걸려 있다. 곁에 마련된 헤드폰을 써 본다. 선생이 여동생과 함께 시 ‘낙화’를 들려준다. 병색이 짙은 음성이 말한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2. 시인의 고향 주실마을

문학관 뒤 산자락을 타고 산책로가 이어진다. 길 옆에는 시비들이 늘어서 있다. 산책로는 세 개의 봉우리 중 중앙 봉우리의 기슭에 닿는다. 그곳에는 지훈 시공원이 있다. ‘승무’ ‘낙화’ ‘다부원에서’ 등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고 그 가운데 시인의 동상이 서 있다. 시를 낭독하는 듯, 마을을 굽어보는 듯, 먼 맞은편의 봉우리를 보는 듯도 하다.

맞은편 봉우리는 문필봉이다. 뚜렷한 정삼각형의 모습이다. 예부터 문필봉을 안산으로 둔 마을에서는 학자가 많이 배출된다고 했다. 주실마을은 박사마을이라 불린다. 땅의 힘이란 역시 솔깃하다. 마을은 조지훈의 선조인 호은공 조전(趙佺)이 1629년에 일구었다고 한다.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똘똘 뭉쳐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마을이다.

마을의 한가운데, 가장 앞에 ‘조박사집’이라 불리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이 자리한다. 선생이 아직 태아였을 때, 선생의 부모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출산이 가까워지자 집안에서는 임신부를 불러 내렸고, 바로 이 집에서 아이를 낳게 했다. 1920년 12월3일, 호은종택 중앙의 가장 좋은 방에서 그는 태어났다. 부친 조헌영과 모친 유노미 사이의 3남1녀 중 2남으로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소년 동탁은 왜정하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우고 마을의 월곡서당에서 한학, 조선어, 수신, 역사, 도서 등을 공부했다 한다. 서당은 영조 때인 1765년에 세워진 것으로 현판 글씨는 번암 채제공(蔡濟恭)의 친필이라 전해지고 있다.

생가의 뒤편에 시인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본가가 있다. 지훈 일가가 떠난 이후 상당기간 폐옥으로 남아 있던 것을 2010년에 복원했다. 대문에는 ‘방우산장(放牛山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그는 수필 ‘방우산장가’에서 ‘방우산장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이른바 나의 집에다 스스로 붙인 집 이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려운 일은 곧 뒷날 내 죽은 뒤 어느 사람이 있어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 주노라는 제 정성으로 방우산장이란 묘석을 내 무덤에다 세워 줄까 저어함이다’라고도 했다. 그는 1968년 5월19일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염려에도 ‘방우산장’ 현판은 달렸지만 지금 우리의 눈에 그것은 고맙고 반갑다.

#3. 시인의 숲, 주곡숲

마을을 숨기고 있는 숲, 주곡숲. 마을의 대문이고, 울타리고, 마을 사람들이 오랜 세월 지극정성으로 가꾸어온 숲이다. 사람들은 이 숲을 ‘시인의 숲’이라 부른다. 문학관에서 오른쪽으로 장군천을 건너면 곧바로 숲으로 든다. 마을의 당산목인 250년생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나무들이 골고루 빼곡히 건강하게 우거져 있다. 그 속에 지훈의 시비 ‘빛을 찾아가는 길’이 있다. ‘돌 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에는/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 中). 그의 생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이 스치는 날’이 있었을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조부 조인석은 6·25전쟁 때 마을이 공산화되자 자결하였다. 부친은 전쟁 때 납북되었고 모친은 전쟁 때 입은 병으로 돌아가셨다. 형 세림은 ‘꽃탑회’로 인해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은 후 악화된 치통에도 술을 마시다 세상을 떠났다. 막내 동위는 학도병으로 참전했으나 아버지가 납북됐다는 소식에 향리로 돌아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역사와 지독히도 하나였던 그의 가족사는 상처 그 자체였다. 이후 선생의 모습은 시인보다는 지사적 논객에 좀 더 가깝다. 5·16 후 그는 ‘혁명정부에 직언하다’ 등의 논설을 쓰는 한편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한 서명 운동을 주동해 정치교수에 몰리기도 했다.

그는 ‘땅 위에 남겨 놓고 간 영혼의 새가 깃들이는 곳 - 그 무성한 숲의 어느 한 가지가 방우산장’이라고 했다. 이 숲에 그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이 숲이 지키는 귀중한 것이 그의 영혼, 마을의 영혼이라고 믿기에, 그리고 빛을 믿기에, 그의 시를 빌려 말하고 싶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는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석문 中).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상북도

☞ 여행정보= 중앙고속도로 남안동IC로 나가 34번 국도를 타고 영덕방향으로 가다 31번 국도 영양방면으로 좌회전해 북향한다. 영양읍 지나 조금 더 올라 일월삼거리에서 좌회전해 918번 지방도를 타고 조금 가면 주곡숲이다. 숲길을 통과하면 주실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문필봉과 주실마을 사이 장군천변에 주차장과 지훈시광장이 있다. 장군천을 건너면 가장 먼저 호은종택이 있고 오른쪽 길을 따라 100m쯤 가면 지훈문학관이다. 문학관 관람은 무료다. 동절기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절기에는 오후 6시까지 개관한다. 매주 월요일, 새해 첫날, 설날, 추석날은 휴관이다. 무료 세미나실은 20명 이상 사용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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