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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사람] ‘세월호 진실규명 1인 시위’ 박기일·이명희씨 부부

2017-01-13

“부끄럽지 않은 어른 되려고…” 630여일 동안 피켓을 들다

20170113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2015년 4월13일부터 매일 아침 대구지하철 상인역에서 세월호 진실 규명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박기일씨(왼쪽)가 세월호 참사 1천일을 맞아 부인 이명희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매주 2회 서명을 받고 노란리본을 나눠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170113
지난 10일 오전, 대구지하철 상인역을 지나가던 한 행인이 박기일씨의 1인 시위를 방해하고 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는 피켓의 문구에 화가 난 듯했다. 박씨는 “방해꾼보다는 지지하고 응원하는 시민이 절대 다수다. 그런 분들에게서 힘을 얻는다”고 했다.

하필이면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이었다. 오전 8시. 아침 출근길에 나선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대구 달서구 지하철 상인역 입구. 박기일씨(50)가 노란색 우드락 피켓을 들고 서 있다. 한겨울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잠시 서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제가 원래 추위를 엄청나게 타는데, 올해는 겨울이 따뜻해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지난해는 얼마나 추웠는지.” 하얀 입김이 그의 안경을 덮고 있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믿으며 내가 선 곳에서 열심히 살아왔다. 세월호 참사는 그 믿음을 허망하게 무너뜨렸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자는 마음으로 노란 리본을 만들고 서명대를 지키고 1천일이 넘게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겠다는 평범한 우리 이웃이다.

1000일 넘어도 해결기미 없는 세월호
오늘도 오전 8시 상인역 입구 선 남편


“특별법 제정이 핫이슈로 떠오르던 때
참사 1년 지나자 슬슬 잊자는 사람들
알려야겠단 생각에 그날 이후 1인시위
보고 세월호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

아내도 “이제라도 제대로 된 나라를…”
리본 제작·서명 받으며‘부창부수’ 행보


“‘지하철사고 땐 뭐 했냐’ 등 쓴소리엔
‘그때 아무것도 못해 지금 나왔다’대답
우리사회 총체적 모순 결정체인 세월호
유가족 ‘이젠 됐다’ 할 때까진 함께할 것”

◆시위하는 남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천일 하고 하루가 더 지난 10일.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을 위한 박씨의 1인 시위는 이날도 계속되고 있었다. 박씨의 1인 시위는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1주년이 되는 2015년 4월13일부터 시작되었다.

“1년까지는 해결될 줄 알았다. 가끔 서명이나 하고 촛불 추모 집회에 참여하면서 1년을 지켜봤다.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없고 사람들은 그만 슬슬 잊자고 하더라.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상인역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 이유였다. 특별법 제정이 한창 이슈로 떠오르던 때였다. 특별법 제정 때까지만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해결해야 할 과제는 끝이 없었다. 특위가 구성되어야 했고, 구성된 특위가 제대로 기능을 해야 했고, 배를 인양해야 했고, 잘못된 특별법을 개정해야 했고. 며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아빠, 며칠 해서 효과가 있겠어요?” 시위에 나선 그에게 고등학생 딸이 말했다. 그리고 아내가 맞장구를 쳤다. “며칠 하고 말 것 같으면 아예 하지 마시라.”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기도 하고, 시작하고 지금까지 한 게 아까워서라도 될 때까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이후 박씨는 오늘까지 매일 오전 8시면 어김없이 상인역으로 ‘출근’한다. 한 시간 동안 피켓을 들고 1인 시위에 나선다.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모른 척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을 마주치며 목례를 하는 사람도 있다. 박씨를 위해 따뜻한 음료수를 사서 건네는 사람도 있다. 물론 항의하는 사람도 있다. 이날도 그랬다.

지하철 한쪽에서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박씨의 1인 시위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중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박씨 옆으로 다가왔다. 다짜고짜 박씨가 든 피켓을 잡아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박근혜 퇴진’이라 쓰인 피켓의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잠시 고성이 오가면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지금까지 서너 명은 대놓고 시위를 방해했다. 몸을 밀치고 소리를 지른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눈을 흘기며 지나가거나 혼잣말로 욕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웃으며 인사를 하고 눈짓으로 응원을 해준다. 장모님 초상을 당해 며칠 나오지 못했을 때는 사람들이 오히려 안부를 물으면서 걱정을 해주었을 정도다. 지난 연말 이후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다.”

피켓은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져 종이를 덧대고 투명 테이프를 발라 처음보다 훨씬 더 무거워졌다. 한손으로 들기엔 버거운 피켓을 그는 한 번도 땅에 내려놓지 않는다. 차마 땅에 내려놓을 수 없다고 했다. 마음을 전하는 일종의 박씨만의 ‘의식’이자 ‘원칙’이다. 오전 6시에 일어나 매일 아침 깨끗이 샤워를 한 뒤 1인 시위에 나서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하루에 적어도 500명 이상이 이곳을 지나다닌다. 그리고 피켓을 본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해결된 것 하나도 없어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혹자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냐고 한다. 하지만 그 끝을 봐야 한다. 나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세월호는 왜 침몰했는가. 왜 제대로 된 구조가 이뤄지지 않았나에 대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박씨는 “정권 교체가 만능일 순 없다. 그 이후까지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을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 모순의 집약이고, 세월호 문제를 푸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그러니 1천일이 아니라 1만일이면 어떠냐고.

20170113
이명희씨는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대구지하철 상인역 근처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고, 직접 만든 노란리본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명희씨 제공>
◆서명받는 아내

부창부수라 했던가. 박씨가 1인 피켓 시위를 한다면, 아내 이명희씨는 세월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상인역 인근에서 서명을 받고 노란 리본을 나눠주는 것이 이씨의 일이다. 두 사람은 1987년 6월 항쟁 즈음 대학에서 공부한 세대다. 세월호 참사 이전까지만 해도 뜻있는 단체에 후원을 하는 정도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세월호 참사 일주일 후인 2014년 4월23일 세월호 특별법 서명이 이씨의 공식적인 활동의 첫 시작이었다. 참사 일주일 동안은 추모 집회에서 촛불을 들고 기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촛불을 껐다. 8월까지 매일 상인동 홈플러스 앞에서 서명을 받았다.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특별법 개정, 세월호 인양. 해도 해도 서명거리는 끝없이 생겨났다.

한 자리에서 몇 년간 서명을 받다 보니 사람들이 ‘전에 했던 그것 아니냐’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일일이 설명을 하고 전단을 나눠준다. 서명은 서민들과 세월호를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인 셈이다. 한 번의 서명 캠페인을 벌이면 100여명이 참가한다. 이씨는 지금까지 10만~20만명 정도의 서명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큰맘 먹고 작정하지 않으면 집회에 참석하기 어렵다. 심정적으론 지지를 하지만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는 셈이다. 특별법 제정까지 600만명 이상이 서명을 했다. 그 이후 대부분의 사람은 문제가 다 해결된 줄 알고 있었다. 관심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다.”

빚 갚는 마음에서, 나부터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호의적인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하철 사고 났을 때는 무엇을 했느냐. 보상을 다 받지 않았냐. 천안함 사고 희생자들은 보상금도 받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는 이씨는 “그때 아무것도 못해서 지금 나왔다고 대답한다”고 했다. 이씨는 “적어도 수습과 마무리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정부의 책임이고 의무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이씨는 “분노와 좌절의 심정으로 서명을 받기 시작했지만, 매 순간이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지지와 응원을 통해 서명 캠페인을 계속해야 하는 원동력을 얻고 있다”는 이씨는 “이는 역설적이지만 세월호가 가져다 준 축복”이라고 말했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시스템, 문화, 의식 그리고 우리 사회의 앞으로 나아갈 길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총체적 모순이 한꺼번에 드러난 게 세월호 참사다. 이렇게 규정한다면 세월호 사안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져야 한다. 세월호 진상이 규명이 된다고 해서 과연 우리 사회가 금방 나아질 거냐, 책임자가 처벌된다고 해서 바로 달라질 거냐, 이렇게 근시안으로 바라보면 답이 없다. 큰 그림으로 보면 왜 진상규명이 필요한지, 왜 책임자 처벌이 필요한지, 그다음 단계에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전 사회적인 의식변화 운동을 시민들이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씨의 활동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광주민주화항쟁이 30년 만에 진실이 밝혀졌다죠? 띄엄띄엄, 줄기차게 세월호와 함께 갈 것입니다. 기한이 없는 셈이지요. 당사자인 유가족들이 이제는 됐다고 할 때까지 어떤 형태로든 함께할 예정입니다.”

글=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사진=황인무기자 him7942@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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