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70224.010330806380001

영남일보TV

① A-Frica는 오늘도 부른다, 대구의 ROCK을!

2017-02-24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대구 록의 자존심…20년차 록밴드‘아프리카’

20170224
전주에서 ‘크림’이라는 밴드로도 활동 중인 베이시스트 유현진. 드러머 정현규와 보컬 윤성은 부부이면서 아프리카의 투톱 역할을 하고 있다.2011년 아프리카에 재합류한 기타리스트 조건호.(사진은 왼쪽부터 차례대로) <아프리카 제공>

난 ‘아프리카(A-FRICA)’.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하드록밴드다. 올해로 스무살. 이 바닥에선 ‘할배 밴드’ 소릴 듣는다. 록(ROCK)의 세계를 좀 아는 이들은 20년째 이짓을 하고 있는 날 보고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엔 다들 존경의 눈길을 보내준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다.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바보고 나이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면 더 바보’라고. 그래 난 아마 ‘바보’인가 보다. 얼마전 누가 우릴 보고 ‘아프리카도 문화재로 지정돼야 한다’고 ‘엄지척’해줬다. 그래 그 맛에 이 짓을 한다.

록밴드! 지구가 존재하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모든 젊은 피에겐 하나의 돌파구이고 복음이다. 록밴드가 사라진 젊음, 그건 죽은 나라다. 그 시절 너나없이 고독했던 우린 서로 담배 권하듯 록밴드를 권했다. 로커는 또래 중에선 ‘짱’으로 통했다. 하지만 그 짱들도 어느 순간 사회인으로 변해갔다. 그건 자연스러운 법칙이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뒤 직장밴드는 가능해도 전업으로 록밴드로 먹고산다는 건 대한민국에선 불가능하다. 부활의 리더 김태원,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 백두산의 리더 김도균, 로커 박완규 등도 솔직히 밥 때문에 연예프로에 출연했다.

록밴드란 ‘젊어 한때의 상징’이다. 그리고 ‘단명(短命)의 상징’이다. 혈기왕성함만 믿고 결성해 머리 기르고 가죽옷에 체인벨트 차림으로 한두 번 무늬뿐인 공연만 하고 금세 해체된다. ‘폼생폼사’ 밴드다. 군대와 결혼이 그들의 복병이다. 군에 갔다오면 뒤늦게 철이 들어 취업하고 결혼한다. 록밴드의 기억은 졸지에 추억이 돼 버린다.

아프리카는 ‘패밀리그룹’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포스인 영원한 드러머 정현규(48), 그리고 아프리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해주는 매니저 겸 공연기획자인 정현수(52), 그리고 메인 보컬인 윤성(40)이 피로 똘똘 뭉쳤다. 정현수·현규는 친형제, 윤성은 현규의 아내. 든든한 세션 기타리스트 조건호도 그림자처럼 아프리카를 호위한다.

눈물과 한숨이 전부랄 수 있는 나의 록스토리를 꺼내기 전에 먼저 록밴드 탄생의 비화부터 들려줄까 싶다.

록밴드의 조상은 비틀스. 1964년 2월7일 오후 1시30분 미국 케네디공항 출구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비틀스 때문이었다. 3천여명의 여성팬이 괴성과 휘파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비틀스는 이틀 후 출연한 미국 최고 프로그램 중 하나인 에드 셜리번쇼에 등장해 7천300만명의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이들이 들고 온 ‘I wanna hold your hand’가 미국 음악시장을 장악한다. 그걸 ‘British Invasion’(영국 록뮤직의 미국 시장 진출)이라고 한다.

한국 록밴드의 역사도 비틀스와 궤를 거의 같이한다. 미군부대 때문에 가능했다. 63년 여름 신중현이 만든 ‘애드포’와 김홍탁·윤항기가 이끈 ‘키보이스’가 국내 첫 록밴드로 등장한다. 그런데 바로 그해 대구에서도 고아로 구성된 막강한 캄보밴드가 태동한다. 전국에 산재한 미8군 클럽을 순회하며 재즈를 연주한 고아 밴드 ‘마이스(Mice)’. 그들이 생활했던 곳은 북구 팔달교를 건너 팔달중앙교회 서편에 70년대 후반까지 존속한 성신 고아원.

65년에는 지역 첫 캠퍼스밴드로 불리는 청구대 소속 ‘SAVAGE’가 등장한다. 80년대로 오면서 대학교 캠퍼스밴드가 절정의 실력을 발휘한다. 대표주자가 국풍 80에 등장해 주목받았던 영남대 에코스(ECHOS)를 비롯해 경북대 공대의 일렉스, 계명대의 비사 등이었다. 숱한 고교 스쿨밴드와 대학교 캠퍼스밴드가 아프리카의 자양분이었다. 내가 태어나던 시절은 IMF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가 절벽으로 추락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록밴드 킬러

일본 지바현 지바시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원래 학자가 꿈이었다. 6·25전쟁 때 참전하셨고 체신공무원이다 보니 도내 각처를 돌아다녔다. 아버지는 주로 관사에서 사셨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기대 때문에 음악은 절대 불허였다. 오직 공부만 강요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예인의 피가 흘렀다. 그 때문에 모자는 맘고생이 많았다. 우리 형제의 음악 유전자는 외가에서 왔다. 특히 작은 외삼촌한테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작곡가 한득민(예명은 추월성)이 그였다. 국내 찬불가의 대다수는 그분이 작곡했다고 보면 된다. 외삼촌은 6·25전쟁 때 대구로 피란 와서 자릴 잡았다. 73년쯤 결성된 여성 듀오 ‘애플시스터즈’로 유명했던 권은경씨가 외삼촌을 자주 찾아와 곡을 받아갔다. 대건고를 나와 ‘빨간구두아가씨’란 노래로 유명했던 남일해씨도 제자였다. 사무실은 중구 계산동에 있었는데 가끔씩 놀러가면 당시로선 무척 귀했던 바나나도 맘껏 먹을 수 있었다. 음악적 감각은 동생보다 형이 먼저 두각을 드러낸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yeongnam/public_html/mobile/view.php on line 399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