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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전태흥의 음악칼럼]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 카라얀 지휘·베를린 필하모니 연주

2017-03-03

촛불을 든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베토벤을 떠올리다

[전태흥의 음악칼럼]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 카라얀 지휘·베를린 필하모니 연주
카라얀
[전태흥의 음악칼럼]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 카라얀 지휘·베를린 필하모니 연주

2년 전부터 시를 써보겠다고 서울 모 대학의 예술대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있다. 대학시절 문학을 공부했던 남편의 꿈을 아는 아내가 다시 시를 써보라고 제안을 했을 때,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무슨 시냐고 손사래를 쳤지만, 아내는 공부에 나이가 무슨 소용이냐며 더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사실 대학 내내 김수영의 시에 흠뻑 빠져 살았고 그의 시집 ‘거대한 뿌리’는 가난한 문학청년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폭압의 1980년대를 힘겹게 건너던 시간, 시를 쓴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고 결국 윤동주 시의 한 구절처럼 세상을 외면하고 부끄러움으로 시를 쓸 수 없어 습작들을 모두 찢으며 세상이 바뀌지 않고서는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삼십 년의 세월을 넘기고 그 다짐을 그렇게 허물고 말았다.

하지만 네 번째 학기를 보내면서 결국 또다시 시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새우고 있다. 시적 재능의 부족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매주 광화문 광장에서 보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 앞에서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독일의 철학자 테어도어 아도르노의 말에 가슴이 찔리고 말았다. 그 말은 “세월호 참사를 잊고서 시를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또한 그것은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지금의 탄핵 정국을 이끈 것은 촛불 혁명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 촛불의 열기 앞에 수구세력의 몰락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에서 보듯이 혁명이 곧바로 구시대를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던 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메테르니히 체제가 성립되자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했던 프랑스 귀족들은 슬그머니 돌아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 16세에 이어 권좌에 복귀한 왕과 더불어 이전에 누렸던 특권과 토지를 되찾으려 책동을 꾀했다. 그 왕정복고는 마치 프랑스의 시민들조차도 과거로 되돌린 것처럼 보였지만 귀족들은 시민들이 이미 왕을 단두대에 보냈던 기억이 있었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혁명을 통해 이미 자유를 경험한 시민들의 기억은 결국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는 부르봉 왕가를 타도하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렇듯 역사는 일시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디더라도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뉴스는 촛불집회와 소위 태극기집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후배의 말처럼 극단적 대립의 장처럼 보였다. 하지만 분명했다. 촛불집회는 평화적이었고 질서정연했지만, 태극기 집회는 성조기와 십자가로 온갖 혐오와 욕설로 덧칠되고 있었다. 심지어 태극기 집회에서는 오늘의 국정을 농단한 자들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귀족들이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다가 시간이 지나자 시민의 기억을 무시하고 다시 수구세력의 결집에 나섰던 것과 똑같은 판박이였다.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린 그들이 혁명의 불꽃 속에서 사라졌듯이 비록 지금 이 순간이 혼란으로 힘들다 할지라도 시민의 힘이 가고 있는 길은 명확해 보였다. 촛불을 든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베토벤을 떠올렸다. “베토벤은 열정적인 민주주의자이며 공화주의자였다. 정치적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나타냈고, 그만의 흔들리지 않는 정치적 이상과 열망을 지니는 서양음악 사상 최초의 음악가였다.”(곽근수 음악 이야기)

프랑스 혁명 정신에 입각해 공화정을 편 나폴레옹을 지지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이상에 심취해 그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인 ‘영웅 교향곡’을 나폴레옹을 위해 썼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공화제를 폐지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악보에 써 놓았던 헌사를 찢어 버리고 다시 작곡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휘자 쿠세비츠키가 조곡으로 연주한 것으로도 유명한 2악장 장송행진곡은 결국 영웅이 아니라 다시 독재로 회귀해버린 효웅의 필연적인 죽음을 뜻함과 동시에 새로운 영웅, 즉 프랑스 혁명 정신이 다시 승리할 것임을 암시한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많은 지휘자의 연주가 있지만 가장 대중적인 연주로는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카라얀의 연주가 있다. 그는 이 곡을 1977년과 1984년 도이체 그라모폰(DG)에서 두 번 녹음했는데 두 번의 연주 모두 왜 그가 베를린 필하모니의 지휘자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지그시 눈을 감고 백발을 휘날리며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그를 떠올리면서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베토벤과 나치에 부역했던 카라얀의 영웅은 과연 누구였을까를 생각한다. 비록 그들이 생각하는 영웅은 서로 달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영웅교향곡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오늘 광장은 폭압에 맞섰던 동학과 4·19의 외침을,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했던 5·18 광주항쟁과 87년 민주항쟁의 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언 땅을 뚫고 피는 이 붉은 동백이 다 지기 전에 세상에게도 자신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시 한 편을 쓰고 싶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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