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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개의 이야기] 칠레 항구도시 발파라이소(Valparaiso)

2017-05-26

130년 된 아센소르 타고 오르는 ‘천국의 골짜기’ 벽화마을

20170526
콘셉시온 아센소르 정류장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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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셉시온 아센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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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가 그려진 벽화가 이곳이 그의 집임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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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그레 언덕의 ‘창공박물관’ 그라피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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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토마요르 광장. 오른쪽이 이키케 영웅 기념탑, 중앙의 회색 건물이 칠레 해군 총사령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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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친애하는 나의 도망자 네루다’라는 칠레 영화가 연일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랬다. 내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머무는 사흘 가운데 온전히 하루를 빼내어 발파라이소를 찾은 것도 순전히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때문이었다.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통해 파블로 네루다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와 정반대에 위치한 남반구의 길쭉한 나라 칠레 사람, 남미에서 보기 드물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정도였다. 그 후 그의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민음사, 2008)를 통해 그의 비판적이고 실천적이며 저항적인 문학 세계를 알아가면서 그에 대한 궁금증을 거둘 수가 없었다. 특히 약 10년의 시차를 두고 우리나라와 닮아 있는 칠레의 현대사와 그 역사와 얽혀 있는 그의 삶은 나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래서 칠레에 발을 디뎠던 순간부터 그의 흔적을 몹시 찾아보고 싶었고, 산티아고에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도 산크리스토발 언덕 근처에 있는 그의 집 ‘라 차스코나(La Chascona)’였다. 그러고 나니 ‘네루다가 사랑한 도시’, 발파라이소에도 몹시 가고 싶어졌다.

산티아고서 120㎞…버스로 1시간30분
주요 항구도시로 남미 횡단철도 시발점
1730년 대지진으로 43개 언덕에 주택가
언덕 오가는 교통수단은 30여 아센소르

알레그레 언덕 ‘국민 詩人’ 네루다의 집
사방 窓 너머 도시 전경·태평양 한눈에
하늘 향해 열린 미술관인 ‘창공박물관’
20여 화가의 그라피티 작품 가득한 마을

해양관문 프랏 부두와 소토마요르 광장
아센소르로 오른 콘셉시온 언덕도 일품



산티아고에서 발파라이소까지는 120㎞로 버스를 타고 1시간30분 정도면 도착하는 멀지 않은 거리다. 천국의 골짜기라는 뜻의 ‘발파라이소’는 1818년에 칠레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면서 칠레를 대표하는 주요 항만 도시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남아메리카 횡단 철도의 시발점이기도 한 발파라이소는 1848년에서 1858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때에도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다. 따라서 발파라이소는 태평양의 보석으로 불리며 유럽 각국에서 남미로 이주하는 유럽인들이 거쳐 가는 이주민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1906년의 대지진과 1914년 파나마 운하 개통으로 발파라이소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지만 이러한 항구도시 특유의 개방적 역사성으로 인해 문화의 다양성이 두드러진다.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이 다양한 유럽식 건축물을 세우고 그들의 생활양식을 도입하면서 발파라이소의 문화는 칠레의 어떤 도시보다도 다채롭게 바뀌었다. 2003년에는 발파라이소 항구 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 도시는 총 43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언덕 도시다. 1730년 대지진으로 인해 주민들이 언덕으로 올라가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이처럼 독특한 주거지가 형성된 것이다. 언덕을 오르내리기 위해 1883년부터 아센소르(Ascensor)라고 불리는 승강기 30여 대를 운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여러 대는 지금도 운행되면서 이 도시의 관광 명물이 되고 있다.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여행을 다룬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도 체 게바라가 발파라이소의 우체국에서 여자 친구의 이별통보 전보를 받고 낙담한 채 아센소르에 몸을 싣는 장면이 나온다.

발파라이소 버스정류장에 내리자마자 파블로 네루다의 집 ‘라 세바스티아나(La Sebastiana)’부터 찾았다. 칠레에는 네루다의 집이 세 채가 있다. 앞서 언급한 산티아고의 집은 애인과 살기 위해 지은 집이었고(당시 그는 후에 셋째 부인이 된 마틸데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가진 애인의 모습을 비유하여 집의 이름을 ‘헝클어진 머리’라는 뜻의 ‘라 차스코나’라고 불렀다), 그가 묻힌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의 집은 망명 후 귀국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곳이면서 또 만년에 인생을 정리하던 곳이었다. 그에 비해 발파라이소의 라 세바스티아나는 그가 번잡한 산티아고 생활을 벗어나 작품 활동에 매진하기 위해 구한 집이다. 산티아고 생활에 싫증이 난 네루다는 1959년 친구에게 발파라이소에 작은 집을 구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조용히 글쓰기에 적합하면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집, 너무 높거나 낮지도 않은 집, 외곽에 있지만 항상 이웃과 교감할 수 있는 위치, 독립적이지만 상업시설과도 그리 멀지 않은 집”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는데, 마음에 꼭 드는 집을 알레그레 언덕에서 찾았던 것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 언덕길을 올라가니 그의 얼굴을 그린 벽화가 그의 집임을 알린다. 사방으로 창을 낸 그 집에서는 창문 너머로 발파라이소 전경과 태평양 연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박물관과 카페로 바뀌어 관광객들을 맞고 있지만 이곳에서 사색하며 민중과 교감했던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는 죽기 2년 전인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이곳에서의 창작 활동이 큰 힘이 되었다. 집 바로 위에는 파블로 네루다 학교도 들어서 있고, 인근 공원에는 인자한 표정의 그의 동상도 서 있어서 이곳이 파블로 네루다 마을임을 알려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발파라이소는 네루다가 그토록 혐오했던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1915년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난 피노체트 장군은 1973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파블로 네루다의 양보로 탄생한 좌파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고 1974년부터 1990년까지 17년간 독재를 휘둘렀다. 이런 사실을 예감이나 한 듯이 네루다는 발파라이소를 ‘배배 꼬인 웃긴 도시’라고도 했는데, 이 도시에서의 생활은 1962년 스페인에서 출간한 그의 시집 ‘Fully Empowered’(Farrar Straus Giroux, 2001)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시집은 네루다 자신이 매우 좋아한 시집이기도 하며, 또 깊은 명상에서 나온 시들로 높이 평가를 받는데, 발파라이소 생활이 만들어준 창작 환경 덕분이었을 것이다.

네루다의 집을 나와 언덕 아래로 내려오면 창공박물관(Museo a cielo Abierto)을 만난다. 이름이 ‘박물관’이지 화가 20여 명이 벽이나 계단에다 그라피티를 그린 마을로, 이름 그대로 ‘하늘을 향해 열린 미술관’이다. 칠레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알베르토 마타도 참여했다고 하니 박물관이라 부를 만하다.

창공박물관을 내려와서 해안의 에라수리스(Errazuriz) 대로를 따라가면 발파라이소의 해양 관문 프랏(Prat) 부두를 만난다. 작은 고깃배에서부터 대형 상선과 군함까지 촘촘하게 정박해 있는 항구의 모습은 복잡하고 다양한 이 도시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부두에서 언덕 쪽으로 발파라이소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소토마요르(Sotomayor) 광장이 이어진다. 광장 중앙에는 태평양 전쟁 때 이키케 해전에 참전했던 해군 영웅들을 기리는 이키케 영웅 기념탑(Monumento de los Heroes de Iquique)이 서 있고, 그 정면에는 칠레 해군 총사령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 북쪽에서 아센소르를 타면 발파라이소의 최고 명소 콘셉시온 언덕을 올라갈 수 있다. 이 콘셉시온 아센소르는 1883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하여 여전히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아센소르가 멈추는 곳에 전망대가 있어서 멀리 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다. 콘셉시온 언덕의 중심이 되는 템플레만 거리 주변에는 다양한 그라피티를 배경으로 분위기 좋은 카페와 호스텔 등이 멀리 보이는 태평양과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발파라이소의 그라피티가 유명해진 것은 다른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프레이 그라피티가 아니라 벽을 캔버스 삼아 다양하면서도 주제 의식이 있는 그림이 많기 때문이다. 골목골목 숨겨진 그라피티를 찾아보는 재미는 발파라이소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시간 여유가 있으며 엘페랄 아센소르를 타고 바부리사(Baburizza) 궁전도 둘러보자. 1916년에 지어진 이 궁전은 1941년부 바야스 아르테 시립미술관으로 바뀌어 유럽과 칠레의 다양한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발파라이소 북쪽 9㎞ 거리에 있는 휴양 도시 비냐 델 마르도 추천할 만하다.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낼 수 있다면 네루다가 묻혀 있는 이슬라 네그라를 가보는 것도 좋겠다. 이 집은 네루다가 1949년 정치적 박해를 피해 칠레를 탈출했다가 1952년 귀국하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한 곳이기도 하며, 죽기 1년 전인 1972년 병든 몸을 치유하기 위해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적, 정치적 동지였던 아옌데 대통령이 1973년 9월11일 피노체트의 쿠데타군에 의해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곳도 이 집이었다. 이 비보를 접하고 12일 만에 네루다도 세상을 떠났다. 이 바닷가 집에 묻히고 싶다던 네루다의 소원은 군부에 의해 무시되었고, 산티아고 자택 근처의 공동묘지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20년이 흐른 뒤에야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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