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70605.010180800570001

영남일보TV

[밥상과 책상사이] 통과의례

2017-06-05
[밥상과 책상사이] 통과의례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시인>

#시험 못 쳤다고 조금 나무랐더니 완전히 드러누웠습니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주말 내내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습니다. 제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제발 나와서 밥은 먹고 들어가라고 애원해도 듣지 않습니다. 저러다가 나쁜 생각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무엇보다 힘든 것은 아빠의 태도입니다. 아이의 저런 모습을 보며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몇 끼 굶는다고 죽지 않으니 그냥 두라고 합니다. 저는 개인 생활도 없이 아이에게 바짝 붙어 모든 것을 아이 뒷바라지에 바치고 있습니다. 아이와 남편 사이에서 정말 힘이 들어요.

#공부 안 해서 시험 못 쳐놓고 부모를 상대로 단식 투쟁하듯 밥 안 먹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행동은 똥 뀐 놈이 성내는 격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시험 못 쳤으면 더 열심히 하겠다는 오기 같은 것이 솟구쳐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러고 있는 것은 너무 포시럽게 키운 우리 잘못 때문입니다. 그냥 두면 절로 해결될 텐데. 엄마가 저러니 아이가 분별력도 판단력도 없는 겁니다. 다 못난 부모 때문에 저러고 있으니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평가원 모의고사 다음 날 부부가 찾아와서 한 말이다. 부모 세대는 지금보다 훨씬 치열한 대입 경쟁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그들 부모의 외형상 간섭은 지금보다 훨씬 덜했다. 사랑의 마음이 지금보다 적어서가 아니다. 그때 부모들은 입시를 포함해 고교 시절에 겪는 굵직한 일들은 누구나 성년이 되는 과정에서 당연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자녀가 한두 명으로 줄어들면서 상당수의 부모들은 시간적·경제적 여력 대부분을 자녀 교육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이와 함께 다양한 부작용이 생겨났다. 부모가 모든 것을 자녀에게 바치기 때문에 아이도 거기에 호응해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 자녀 사이에 일종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생겨났다. 부모 자녀도 서로 투자와 생산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자녀를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부모의 욕심을 위해 몰아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간섭이 지나칠수록 아이는 부모와 가정에서 점점 멀어진다.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정서적 안정 속에서 휴식을 취하며 내일을 위한 활력을 얻게 되는 재충전의 원천이다. 이제 우리는 비정상적이고 비생산적인 교육 열기를 차분히 가라앉히며 자녀 양육이 가족의 행복과 직결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해야 한다.

나는 시간이 좀 지나면 밥도 먹고 괜찮아질 것이라며 당분간 그냥 지켜보라고 했다. 아빠에게는 아들과 마주 앉아 아이의 좌절과 힘겨움을 들어주며, 그 과정은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임을 이야기하고 어깨를 한 번 툭 치며 격려해주라고 당부했다. 엄마에게는 자녀의 몸종이 되지 말고 엄마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때 아이가 오히려 엄마를 따르고 존경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적절한 거리는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