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70904.010130733140001

영남일보TV

[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2] 불의에 맞선 강직한 관료 ‘김치(金峙)’

2017-09-04

[고려 문과] 창왕 즉위년(1388) 무진(戊辰) 무진방(戊辰榜) 병과(丙科) 4위
불의에 맞서다 파직…忠心을 아는 왕은 그를 부르고 또 불렀다.

20170904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공원에는 장원방 출신 과거급제자들의 간략한 이력을 새긴 비석이 들어서있다. 장원방 출신 첫 과거급제자인 김치를 소개하는 비석이 첫 자리에 들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영남일보 DB>
20170904
사헌부와 사간원은 사안에 따라 연대해 탄핵하기도 했지만 비위 사실이 있을 때는 서로 봐주지 않고 맞탄핵 하기도 했다.양사의 갈등으로 김치는 지평 자리에서 파직당하기도 했다.
20170904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11월23일 정미 첫 번째 기사. 지평 김치가 사헌부 동료들과 함께 사간원 관료들의 비위 사실을 알고 탄핵했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헌부 지평 시절 김치는 불의를 보면 절대 넘어가지 않는 강직한 관료였다.

선산 장원방(壯元坊, 옛 영봉리, 지금의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 출신 과거급제자 15명 중 첫손에 꼽히는 인재는 길재의 제자이자 김해부사를 지낸 김치(金峙)다. 그는 고려 창왕 즉위년인 1388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다. 조선 개국 9년 뒤인 1401년(태종 1)에는 정5품의 사헌부 지평(持平)의 중책을 맡았다. 이후 정랑(正郞),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김해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김치는 사헌부 지평 시절 불의에 맞서 뜻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관료로 명성을 떨쳤다. 이 때문에 파직까지 감내해야만 했다. 태종 때 견내량만호(見乃梁萬戶) 목철(睦哲)의 비리를 밝혀낸 일화도 유명하다. 김해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장원방에 낙향해 김숙자와 함께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숙자의 아들인 김종직도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뿐만 아니라 왜구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선산의 객관을 정비하는 데 앞장섰고, 사당을 세워 선산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릴 만큼 효행도 지극했다.


길재의 제자…장원방 첫 과거급제
태종 즉위년에 사헌부 지평 맡아
부정한 일 따지다 탄핵 소용돌이
견내량 만호 비리 밝힌 일화 유명
세종때 지사간·김해부사 등 지내

관직 물러난 후엔 낙향해 후진양성
왜구가 훼손한 선산 객관정비 힘써



#1. 장원방의 첫 과거급제자

1388년, 날로 스러져가던 고려에 어린 창왕(昌王, 1380~89)이 즉위했다. 동시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과거시험 무진방(戊辰榜)이 치러졌다. 나라가 어수선한 와중에도 관직에 뜻을 둔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33명이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합격자는 등수에 따라 을과(乙科), 병과(丙科), 동진사(同進士) 세 단계로 나뉘었는데, 병과 4등이 바로 김치(金峙)였다. 공교롭게도 동진사 6등이 한자를 다르게 쓰는 동명이인의 김치(金)였다.

김치는 선산(善山) 영봉리(迎鳳里), 즉 장원방(壯元坊) 출신으로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제자였다. 장원방이 배출한 첫 과거급제자이기도 하다. 이름인 ‘치(峙)’가 품은 ‘우뚝 솟다’라는 뜻답게 무척이나 반짝거리는 인재였다. 과거급제 이후 벼슬길에 오른 김치는 조선 개국 9년 뒤인 1401년(태종 1), 정5품의 사헌부 지평(持平)의 중책을 맡았다. 사헌부는 사간원, 홍문관과 더불어 삼사(三司)로 불렸다. 언론을 담당한 부서로, 그중에서도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들을 일러 대간(臺諫)이라고 했다.


#2. ‘탄핵’이라는 회오리의 시작

“정치란 것은 옛것과 새것을 가리지 않는구나. 나라가 새로 선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불안한 것들 천지 아닌가. 내 이제 대간이 되었으니 지혜가 필요한 때라.”

대간의 역할은 정치 전반에 대한 비판이었다. 특히 부정한 일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탄핵도 서슴지 않아야 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사안에 따라 연대해 탄핵하기도 했고, 비위 사실이 있을 때는 서로 봐주지 않고 맞탄핵 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시시비비를 가리고 따지다가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수도 있었다. 그런데 김치가 바로 그 격랑에 휩쓸리고 말았다.

1401년(태종 1) 10월의 일이었다. 당시 태종은 풍해도 평주(황해도 평산)에 행차 중이었다. 그곳의 온천에 머물고 있던 태상왕 태조의 생일을 맞이해 인사를 간 것이었다. 수많은 신하들이 임금을 수행했고, 그중 사간원과 사헌부의 대간들도 속해 있었다. 그런데 풍해도의 안렴사(按廉使, 지방장관) 김분이라는 자의 하는 짓이 퍽 볼썽사나웠다. 술과 고기에 말먹이까지 잔뜩 준비해서는 내내 호위 무리를 따라다니며 권신들만 골라 아첨을 떨기 일쑤였다. 심지어 김분의 수하로 짐작되는 이가 차사원(差使員, 중요한 임무를 맡은 임시관원)이 싣고 가는 말먹이를 빼앗는 일마저 발생했다. 의정부가 득달같이 사헌부에 조사를 요청했다. 이에 김치의 사헌부 동료인 박고가 김분을 찾아갔다.

“차사원이 싣고 가는 말먹이를 빼앗는 그 자가 누군지 아실 터이니, 밝혀주시오.”

하지만 김분은 끝내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았다. 이에 박고가 김분 대신 그 부하를 잡아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태종이 격노했다.

“나라의 경사인 태상왕의 생신이라 죄수까지 석방한 마당에, 네가 무슨 까닭으로 소란을 피운 것이냐? 도성으로 먼저 돌아가라.”

하지만 주변에서 만류했다.

“박고가 한 행동은 나라와 전하에 대한 충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백성에게 해만 끼친 김분의 짓과는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간(司諫, 종3품) 김첨을 비롯한 사간원의 관원들은 입을 다물고 나서지 않았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정의 김치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대간이 저래서야 쓰겠는가. 사사로운 감정에 앞서 직언을 하지 않고 외면하다니 말이다.”

곧장 김치는 사헌부 동료들과 함께 사간원의 사간 김첨을 탄핵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3. 탄핵의 날카로운 여파

평주 일이 있고 난 11월, 김치가 동료들과 함께 사간원의 관료들을 또다시 탄핵했다.

“사간원의 사간 김첨과 윤사수, 지사간(知司諫, 종3품) 성발도, 사인(舍人, 정4품) 조서, 헌납(獻納, 정5품) 권훈, 정언(正言, 정6품) 정안지와 한고 등을 탄핵합니다. 그들은 간관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도성 안 여기저기에서 창기까지 불러 밤새 술을 마셨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대간의 품위를 해쳤으니 탄핵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김치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사간원 헌납 한승안이 분에 받쳐서는, 김치를 비롯해 사헌부의 대사헌(大司憲, 종2품) 이지, 장령(掌令, 정4품) 박고와 이반, 지평(持平, 정5품) 송흥을 맞탄핵 해왔다.

사헌부 입장에서는 기가 찰 일이었다. 하여 “대체 누가 누구를 탄핵한다는 말이냐?” 하고는 무시해버렸다. 이에 열이 뻗칠 대로 뻗친 한승안이 사간원 소속의 나장을 동원해 밀고 들어왔다. 김치가 대로했다.

“지은 죄도 없거늘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고는 동료 이반과 송흥, 사헌부에 딸린 나장과 더불어 사간원의 나장을 형조의 옥에 가두어버렸다.

이에 분노한 한승안이 태종에게 상소로 일렀다. 하지만 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되레 한승안 본인이 탄핵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달포쯤 뒤인 1402년(태종 2) 1월, 사간원에서 다시 상소를 올렸다. 지난 평주에서의 일을 걸고 넘어간 것이다.

“김치 등은 단지 김첨이 직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했습니다. 하오나 저희들 생각으로는 김첨에게만 그럴 것이 아니라, 일의 빌미를 제공한 김분의 참소를 믿은 전하의 실수도 더불어 비판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뭘 잘했다고 저리 버젓이 돌아다니는지, 저희들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구 하나가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바로 임금이 ‘참소하는 말을 믿었다’는 부분이었다. 태종은 상소를 내던지며 크게 화를 냈다. 당황한 승지들이 사안을 설명하려다가 나온 표현일 뿐이라며 대신 해명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사간원의 관원 몇 명을 귀양 보내고서야 태종은 가라앉았다. 해를 넘긴 난리 통에 아무 죄 없는 김치마저 결국 지평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대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잘못한 것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김치는 억울한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그렇다고 나라에 대한 충정마저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늘 임금과 나라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김치의 충심을 태종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4. 파란만장 관직생활과 그 후…

아니나 다를까, 태종이 김치를 다시 찾았다. 거제도의 견내량(見乃梁)으로 내려가 만호(萬戶·군사조직 만호부의 관직) 목철(睦哲)의 일을 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명 받잡겠나이다.”

김치가 추상같은 서슬로 조사한 내막은 이러했다. 견내량의 만호 목철이 일본 사신이 탄 배 한 척을 잡아 열다섯 명의 목을 베고는 상부에 도적을 잡았다고 고한 것이 먼저였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상을 두둑이 챙기기까지 한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일본 사신이 와서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거짓으로 조정을 능멸하고 외교에 문제를 일으킨 큰 죄였다. 그러한 내막이 김치에 의해 낱낱이 밝혀지면서 결국 목철은 죽음으로 죗값을 치러야 했다. 이 일을 명쾌하게 처리하고 도성으로 돌아온 김치는 정랑(正郞·정5품)을 제수받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김치는 사헌부가 임의로 옥쇄장(獄匠, 옥의 죄인을 지키는 나장)을 부린 일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소송건이 드러나 파직되고 말았다. 파직을 거듭했지만 김치는 이후 조정의 부름을 계속 받았다. 그의 능력과 충심을 임금이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김치는 1418년(세종 1)에 사간원의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종3품), 그리고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이르렀다.

김해부사를 끝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김치는 고향인 선산 영봉리, 즉 장원방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오랜 관직생활 후 돌아온 고향 선산은 예전과 달랐다. 예의범절과 문물이 너무 흐트러져 있었다.

“내 학자 된 자로 가만히 앉아 탄식만 할 것이 아니다. 예를 솔선수범하고, 그 뜻을 안팎으로 전해 교화에 힘써야겠다.”

김치는 사당을 세우고 백성들을 교화해 나갔다. 이후 마을은 절의와 효 사상이 점차 뿌리를 깊게 내렸다. 동시에 사신들이 묵는 객관을 정비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당시 선산의 객관은 우왕 때 왜구가 헤집고 난 이후로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선산은 교통의 요충지여서 객관을 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김치의 노력으로 선산의 객관 정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낙향한 김치가 가장 공을 들인 일은 ‘교육’이었다. 선산은 성리학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학문을 숭상하는 유학적 기풍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김치는 친분이 두터웠던 김숙자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김숙자의 아들이자 영남사림의 영수가 된 김종직이 김치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훗날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모아 편집·간행한 ‘이존록(彛尊錄)’에서 김치를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같은 선산부 사람으로 벼슬은 김해부사에 이르렀다. 영봉리 집과 서로 이웃하여 살았다. 기해년에 지사간으로 참시관(參試官·과거시험 감독관)이 되었다.’

특히 김치는 사후인 1472년(성종 3)에 이효정려(以孝旌閭), 즉 효행을 인정받아 정문(旌門)을 내려 받기도 했다. 정문은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집 앞에 세워주던 붉은 문을 일컫는다. 뛰어난 학식에 효행마저 더해진 김치는 성리학적 윤리를 제대로 실천한 장원방의 인재였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조선왕조실록, 선산의 맥락,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yeongnam/public_html/mobile/view.php on line 399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 인기기사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