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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윤규홍의 시시콜콜 팝컬처] 데이비드 보위

2017-10-13

글램의 시대는 갔고, 나 같은 팬도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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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위의 1973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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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위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잘 차려입고 외출한 모습.

벌써 한 달이 다 된 이야기다. 왼쪽 눈의 시력이 이상할 정도로 갑자기 안 좋아져서 친구가 하는 안과를 갔다. 친구가 섬뜩한 이야기를 했다. “시간을 재촉하는 병세다. 급히 대수술을 하지 않으면 조만간 실명을 피하기 힘들다.” 더 큰 병원으로 옮겨간 내게 지난 한 달 동안은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 그래도 이렇게 더듬더듬 글을 다시 쓰게 된 것만으로도 여러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병상에 누워서 책이나 TV도 잘 볼 수 없는 처지인 탓에 음악을 대신 파고들었다. 그중에서도 데이비드 보위의 CD를 가장 많이 들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역시 눈을 다친 이력이 있는 그가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작년 1월에 세상을 떠난 직후 추모 분위기를 탔던 일은 이제 한참 지났으며, 얼마 전 EIDF(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데이비드 보위를 다룬 작품에 대한 관심도 미미했다. 과연 이 영국 가수를 대중문화를 가볍게 다루는 이 지면에서 이야기하는 게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1개월 동안 적어도 내게 으뜸이 됐던 팝컬처는 귀로 들었던 KBS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도, 쇠락한 왕조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 은퇴도 아닌 데이비드 보위였던 건 분명하다.

시력 이상으로 병상서 보낸 지난 한 달
작년 세상 떠난 데이비드 보위 CD 심취
48년 평생 그의 全앨범 사 모은 광팬으로
한 눈 실명한 그의 이력 자꾸 생각난 탓도

1970년대 英서 시작된 글램록의 선구자
69년 평생 대중음악계서 늘 앞서간 그
팝송세대가 퇴장한 지금 큰 반응 없지만
영화배우로, 퇴폐적 댄디로도 이름 날린
지난 세기의 일부는 온전히 그의 시대


내가 이 가수를 처음 알게 되었던 게 중1 때 어떤 하이틴 잡지 부록으로 따라 나온 팝스타 소사전을 보고서였다. 웃긴 게 몇 줄씩밖에 소개될 수 없었던 좁은 칸에 데이비드 보위는 대표곡 몇 개에 영국을 대표하는 실험적인 가수라는 평가에 앞서 그가 가진 오드 아이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는 사실이다. 청소년 시절 한 여자아이를 두고 주먹질을 하다가 다친 한쪽 눈은 끝내 실명을 했고, 파란 눈과 회색 눈을 가진 기묘한 분위기가 팬들을 압도한다나 뭐라나. 그때만 하더라도 적잖은 한국 잡지들은 일본에서 발행되는 영화전문지나 음악잡지를 베끼다시피 했고, 배보다 배꼽이 커진 그 소개 글도 모르긴 몰라도 급하게 인용되는 와중에 생긴 일이었을 것 같다. 분명히 그는 단지 짝눈으로만 유명해질 수 없는 위대한 예술가다. 69년 평생을 대중음악계에서 항상 앞서 나가던 인물이라고 평가를 내리기에, 48년 평생 데이비드 보위가 남긴 모든 앨범을 사서 모았던 그냥 소비자 입장에 불과한 내 말은 주제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긴 한데, 데이비드 보위는 그가 건드렸던 프로그레시브록, 재즈, 솔(soul), 하드록, 디스코, 얼터너티브, 일렉트로니카 등 모든 계열에서 최고 위치에 오른 예는 하나도 없다. 자신이 창시하다시피 한 글램록을 빼고 나면 그가 남긴 음악은 단지 악보상으로는 아주 독창적인 작품이 못 된다. 예컨대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벨벳언더그라운드가 없었다면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사실 옛날 로큰롤에서 출발했다. 지금처럼 음악환경이 좋지 못했던 예전에, 나와 친구들은 데이비드 보위를 따라 연주하고 싶지만 악보를 구할 수 없는 관계로 막귀로 듣고 악기 파트별로 스코어를 따서 오선지에 옮겼다. 처음에 나는 리듬 파트를 기타로, 멜로디 파트를 피아노로 진행시켜보니 거기선 아주 단순하고 정직한 사운드가 나왔다. 데이비드 보위는 여기에 자신만의 새로운 감각을 얹었던 것이다.

그의 음악은 젊은 시절부터 비트를 뒤로 물리고 느긋한 흐름을 바탕에 두지만, 저음부의 베이스를 뺀 고음부나 협화음을 기타의 피킹 하모니 혹은 클래식 현악기 구성으로 삼는 예가 많았다. 이는 항상 첨단을 달리는 듯한 그의 이미지와 달리 그 사운드의 핵심이 신시사이저가 아니라 기타와 바이올린·첼로 같은 현악기란 사실을 뜻한다. 많은 가요팬이 사랑한 거미의 히트곡 ‘사랑했으니.. 됐어’를 들어보면, 데이비드 보위가 1970년대 중반에 시도했던 창법과 연주가 흘러가는 방식과 닮았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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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중은 거미와 같은 음악에 2000년대 와서야 열광한 것처럼 그동안 데이비드 보위의 팝송을 친숙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구구절절한 발라드도 없고, 귀에 달라붙는 후크도 없는 그의 음악은 팝송세대가 퇴장한 지금 대중음악계에서 큰 반응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데이비드 보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은 재미있다. 내 일이 일인지라 주변엔 개성 넘치는 예술가들이 많다. 이들 중 데이비드 보위 팬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앗, 윤 선생님도 보위 팬이세요?” “아, 팬 정도까진 아니고요, 몇 곡 즐겨 들었죠.” “윤쌤 혹시 스페이스 오디티도 좋아하시죠?” 많은 사람은 데이비드 보위를 좋아하고, 그렇지만 스페이스 오디티밖에 모른다. 70년대 이후 그는 ‘틴 화이트 듀크’나 ‘알라딘 세인’같이 여러 캐릭터를 자기 페르소나로 내세웠지만, 사람들은 ‘지기 스타더스트’ 이야기만 한다. 대중이 음악 이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영화배우로서, 혹은 미술가로서 데이비드 보위의 경력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놀랄 일은 못 된다. 그들은 진심으로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를 좋아한 걸까. 아니면 그 정도는 좋아해야 기가 눌리지 않을 거라고 계산을 세웠던 걸까.

아마 나 말고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을 법한데 83년에 나왔던 ‘렛츠 댄스’는 그가 그때까지 안 해서 그랬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단 걸 보여준 작품이다. 하늘색 양복을 입고 또 새로운 퇴폐적 댄디의 페르소나를 드러냈던 그 나이가 서른 중반이었다. 얼마나 좋은 남자 나이인가. 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임에도 말쑥한 차림으로 외출하던 사진이 자꾸 생각난다. 눈 수술을 받고 공식 특강 때문에 선글라스를 끼고 연단에 서던 날, 대기 시간에 이어폰으로 그의 음악을 들었다. 아주 어린 친구가 나더러 어떤 음악을 듣는지 궁금하다 했다. “데이비드 보위.” “잘 알죠. 옛날 팝송이네요.” 맞다. 그는 이제 과거의 사람이 되었다. 글램의 시대는 갔고, 나 같은 팬도 늙어간다. 그는 갔지만, 또 어떤 예술가가 데이비드 보위의 자리를 채울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의 일부는 온전히 그가 펼친, 그를 위한 시대였다.

P&B 아트센터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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