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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8] 장원방의 명문가 진양하씨(晉陽河氏)- <상> 대(代)를 이어 벼슬길에 오르다

2017-10-30

“아픈 형 유배길 동행케 해달라” 하위지, 세종에게 애절한 상소
하담=[조선 문과] 태종 2년(140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을과 2위[亞元]
유면=[조선 문과] 태종 5년(140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을과 1위[壯元]
하강지=[조선 문과] 세종 11년(142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9위
하위지=[조선 문과] 세종 20년(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을과 1위[壯元]
하기지=[조선 문과] 세종 20년(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병과 5위

20171030
하위지는 유배 간 형이 위독하고 동생 하기지마저 세상을 떠자 세종에게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러한 내용은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4월 17일 무신 첫번째기사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20171030
단계 하위지가 장원급제 후 금의환향할 당시 기념식수로 심었다는 회화나무. 장원방 일대인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에 있는 나무로, 이 마을에서는 예부터 ‘하위지 장원급제 나무’로 불리고 있다. <영남일보 DB>


한 마을에서 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장원방(옛 선산 영봉리,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의 최고 명문가는 진양하씨(晉陽河氏) 집안이다. 하담(河澹)을 비롯해 그의 아들 4형제 중 하강지(河綱地), 하위지(河緯地), 하기지(河紀地)가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막내 하소지(河紹地)도 생원시까지 합격했다. 여기에 하담의 장인 유면(兪勉) 역시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로 급제자 명단에 올랐다. 진양하씨 집안은 처가를 합쳐 한 집안에서 5명(하담, 하강지, 하위지, 하기지, 유면)의 급제자가 나온 장원방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사육신으로 명성을 날린 하위지가 단종복위를 꾀하다 집안 전체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만다.

한 집안 5명 급제한 장원방의 명문家
하담, 세종 신임 얻어 지청송군사 부임
장인 유면 사위보다 3년 늦게 장원급제
하담의 세 아들도 연이어 벼슬길 올라

의좋은 형제 서로에 일 생기면 나서 해결
동복현감 첫째 하강지가 모함 받았을 때
둘째 “간절한 상황 굽어 살피소서” 상소
애통절통한 부탁에 세종 온갖 편의 봐줘

#1. 진주 선비 하담, 선산 영봉리에서 날다

무릇 잘난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했다. 하담(河澹)이 그러했다. 시작은 혼사였다. 진주의 이름난 가문 진양하씨(晉陽河氏)의 문하평리(門下評理, 종2품) 하지백(河之伯)이, 아들 하담을 선산 영봉리의 유면(兪勉) 집안으로 장가보낸 것이다. 당시는 남자가 혼례를 치른 후 처가에서 살다가 자녀가 성장하고 나서야 본가로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하담은 자연스럽게 영봉리에 정착했고, 장인 유면의 든든한 지원 아래 학문에 집중했다. 그리고 1402년(태종2) 4월3일, 식년시(式年試) 임오2년방(壬午二年榜)에 응시해 부장원(副壯元, 2등)으로 급제했다.

이후 순조롭게 관직생활을 이어가던 1427년(세종9) 2월의 일이었다. 하담에게 지청송군사(知靑松郡事, 청송군수)의 직을 맡으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청송은 세종의 아내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본향이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던 세종이 평소 관심을 두고 지켜보던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목민관 파견에도 신중을 기했다. 그런 세종이 하담을 발탁한 것이다. 천성이 충실하고 효심이 지극하며 절개 또한 굳은 인물이라는 평가였다. 또한 긴히 맡길 일도 있었다. 당시 소헌왕후는 외척을 경계한 상왕 태종에 의해 친정이 풍비박산 되어, 마음에 상처를 크게 입은 터였다. 세종은 그런 소헌왕후를 위해 청송심씨(靑松沈氏) 집안에 이것저것을 챙겨줄 의향이었던 것이다.

하담은 세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청송에 부임한 이듬해인 1428년, 세종과 약속했던 바를 착실히 이루었다. 찬경루(讚慶樓), 만세루(萬歲樓), 운봉관(雲鳳館) 건립이었다. 찬경루와 만세루는 청송심씨 집안의 제각(祭閣), 운봉관은 객사(客舍)였다. 객사는 고을의 권위를 나타내는 건물이었다.

하담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1446년(세종28)에 둘째아들 하위지가 “제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오직 형을 아비처럼 의지하고 살았는데”라고 한 것을 보면, 지청송군사 직을 수행하고 그리 오래지 않아 세상을 뜬 것으로 보인다. 세종을 크게 보필할 인재였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2. 하담의 장인 유면, 사위보다 늦게 출사했지만

하담이 급제하고 3년이 지난 1405년(태종5) 4월21일, 을유5년방(乙酉五年榜)이 치러졌다. 이 시험에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하담의 장인 인동유씨(仁同兪氏) 유면(兪勉)이었다. 선산 영봉리에 살았던 유면의 과거가 왜 그리 늦어졌는지, 그 내막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는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함으로써 반전을 만들어냈다. 이때 부장원에 이름을 올린 이가 바로 훗날 세종 조에 ‘농사직설(農事直說)’ 등을 편찬하게 될 정초(鄭招)였다. 정초 역시 장원방 출신이었다.

유면은 직언을 서슴지 않는 인재였다. 그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정5품)이던 1409년(태종9)만 해도,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겨냥한 가감 없는 발언으로 태종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당시 민씨 형제는 세자(양녕대군)를 이용해 권력을 잡고자 했다는 죄목으로 이태 전부터 유배지를 떠도는 상태였다. 그런데 민씨 형제에게 죄가 없다며 두둔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유면은 민씨 형제를 살려두었다가는 후일 세자가 보위를 이었을 때 후환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민씨 형제를 내치라”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태종에게는 민씨 형제를 완전히 숙청할 생각이 없었다. 이에 실망한 유면은 사직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강수를 두었다. 태종은 그런 유면을 탓하지 않고 한 달 뒤에 다시 복직시켰다. 하지만 유면의 건강 상태가 태종의 신임을 뒤받쳐주지 못했다. 15년 후인 1419년(세종1) 2월,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 흥해군수)의 업무를 수행하던 중 병사(病死)하고야 만 것이다. 둘째 외손자 하위지의 나이 고작 일곱 살이었다.



#3. 의좋은 형제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총기를 물려받아서인지, 하담의 아들들은 모두 영특했다. 장남 강지(綱地)를 비롯해 위지(緯地), 기지(紀地), 소지(紹地) 모두 남달랐다. 아직 어렸던 소지를 제외하면, 3형제의 관로 또한 평탄히 열렸다. 물론 처음으로 문을 연 것은 맏이 강지였다.

하강지는 1426년(세종8), 식년시를 통해 생원이 되었다. 그리고 1429년(세종11) 4월7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기유11년방(己酉十一年榜)에서는 동진사(同進士) 9위에 이름을 올렸다. 하위지와 하기지 형제도 그 뒤를 따랐다. 1435년(세종17) 식년시에서 나란히 생원이 된 데 이어, 1438년(세종20) 무오20년방(戊午二十年榜)에도 함께 도전했다. 이 시험에서 하위지는 을과(乙科) 장원(壯元)의 영광을 차지했고, 하기지는 병과(丙科) 5위로 급제했다. 관직의 경우, 하위지는 부제학(副提學, 정3품)과 예조참의(禮曹參議, 정2품)를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 종2품)까지 올랐고, 하강지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정6품)과 전라도 동복현감(同福縣監) 등을 지냈다. 하기지는 성균학유(成均學諭) 등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막내 하소지도 성장했다. 1447년(세종29), 생원진사시 사마방목정통12년아세종대왕29년정묘식(司馬榜目正統十二年我世宗大王二十九年丁卯式)에서 3등으로 급제해 생원이 된 것이다.

형제들은 의가 좋았다. 서로에게 일이 생기면 나서서 돕고 더불어 해결하고는 했다. 대표적인 예가 1446년(세종28)에 동복현감이었던 하강지가 모함을 받았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였던 하위지는 형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다. 하지만 결국 하강지는 유배의 벌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하강지가 병자라는 사실이었다. 가슴이 아팠던 하위지는 아픈 형의 유배길에 동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세종에게 부탁했다. 세종은 선선히 허락하면서 말을 타고 갈 수 있도록 힘써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하강지는 더 위독해졌고, 설상가상 아우 하기지마저 죽고 마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도 세종은 하위지가 형을 구완하고 아우의 초상을 무난히 치를 수 있도록 온갖 편의를 봐주었다. 이에 감복한 하위지의 애통절통한 상소가 세종에게 전해졌다.

“제가 무슨 공로가 있다고 이렇게 특별한 은총을 내려주십니까. 눈물이 비 오듯 내리고, 대궐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하지만 제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오직 형을 아비처럼 의지하고 살았는데, 그 형이 저리 옥에 갇힌 데다 몸마저 온전치 못합니다. 게다가 아우마저 죽었습니다. 저의 위태롭고 간절한 상황을 굽어 살피셔서, 지금 맡고 있는 직에서 물러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세종이 마지못해 허락했다.



#4. 멸문지화의 비극

시간이 흘렀다. 하위지는 몸과 마음을 추슬러 복직했고, 그러는 동안 세종과 문종이 세상을 뜬 후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비극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양대군이 본격적으로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이었던 하위지는 정치판에서 떠나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1453년(단종1) 7월24일, “다리에 병이 나서 걸을 수조차 없으니 요양을 해야겠습니다” 하고는 선산으로 내려가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은 10월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다. 나라가 수양대군의 차지가 된 것이다.

수양대군은 하위지의 복귀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아프다고 하면 약과 고기를 챙겨 보낼 정도로 하위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급기야 단종 말년에는 예조참의(禮曹參議, 정3품)를 제수하였고, 자신이 즉위(세조)한 후에는 예조참판(禮曹參判, 종2품)의 직을 내리면서 관직에 임해줄 것을 내내 종용했다. 하위지는 결국 도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세조가 주는 것을 받아 쓸 수는 없다’며 녹봉을 따로 모아두고는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였다. 하지만 결국 발각되고야 말았다.

1456년(세조2) 6월8일, 세조에게서 살기등등한 어명이 떨어졌다.

“친자식들을 모조리 연좌시켜 교수형에 처하고, 어미와 딸, 처첩, 조손(祖孫), 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고을의 노비로 영속시키며, 16세 미만인 자는 나이가 찰 때까지 지방에 살게 하다가 멀리 안치시키라.”

벼슬아치들이 군기감 앞길을 가득 채우고 선 가운데, 하위지에 대한 거열형(車裂刑, 죄인의 팔다리를 각각 수레에 묶고 수레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서 찢어 죽이는 형벌)이 집행되었다. 선산에 살고 있던 호(琥)와 박(珀), 두 아들도 처형당했으며 딸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당연히 다른 형제들에게도 화가 미쳤다. 그야말로 멸문지화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 하강지의 아들 하분, 하기지의 아들 하포와 하귀동이었다. 16세가 되지 않은 덕이었다. 그 중에서 하귀동은 훗날 하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하위지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다. 그리고 하위지는 1758년(영조34)에 신원이 복원되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로의 추증과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바로 그것이었다. 무려 300년이라는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덧붙여, 하위지가 포함된 사육신(死六臣·하위지,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이라는 호칭이 ‘조선왕조실록’의 본문에 등장한 것은 인조 때였다. ‘인조실록 2권’ 1623년(인조1) 7월27일, 변란을 고하는 내용에 “혹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사육신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사육신’이 ‘충절’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공동 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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