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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27] 대구시보 허위보도사건

2017-11-09

‘여운형 탈당’ 誤報로 대구지역 신문인 대회 열려

20171109
20171109
대구시보의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 탈당보도가 허위로 드러나자 대구지역 신문인들은 사장과 편집자, 필자의 퇴진을 권고하는 결의를 하였다. <영남일보 1946년 5월15일자>

1946년 5월13일 오후 3시. 경북도청 회의실에 영남일보를 비롯해 남선경제, 민성일보 등 대구지역 주요 신문의 기자와 편집인 등 3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동료와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는 때문인지 굳은 표정으로 대구신문인 대회를 시작했다. 쉬는 시간 없이 2시간여가 흐르자 회의실 문이 열렸다. 그러고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혼돈의 시국 속 거센 후폭풍
“사회혼란 야기 신문권위 실추”
군정청 임명 사장 퇴진 권고


‘1. 중대한 허보를 게재하여 사회를 혼란하고 민심을 의혹케 하며 겸하여 신문사상에 그 유례를 보지 못한 사과기사를 게재하였음은 전 신문의 권위를 실추하고 전 신문인의 체면을 오손시켰다. 이 책임에 대해 사장 이하 편집자 필자의 인책을 권고함 2. 대구시보 기자는 대구신문기자단에 가맹을 거부함 3. 대구시보사원은 대구신문편집주필자회에서 제명함~’(영남일보 1946년 5월15일자)

대구시보는 1946년 5월10일자 신문에서 조선인민당 당수인 여운형의 탈당을 보도했다. 당의 우두머리가 탈당했으니 당으로서는 이만저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운형은 탈당하지 않았다. 허위보도였다. 정국은 좌우합작이나 통일정부 수립 등을 둘러싸고 꽤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허위보도에 대한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었다. 보도 하루 전 인민당을 탈당한 인물은 여운형의 아우이자 감찰위원이던 여운홍이었다. 지역 신문인들은 보도가 허위로 드러나자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신문계의 큰 오점을 남겼다며 편집책임자는 물론 대구시보 사장인 장인환의 퇴진을 권고했다. 당시는 신문인들이 특정사안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낯설지 않았다. 잘못된 보도를 두고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 또한 이상할 게 없었다.

‘1월4일(금)로부터 1주간 대구시보는 군정청령에 의해 정간케 되었다. 1945년 10월20일부 조선군정청령 제19호에 의하면~ 군정청을 방해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다 불법이다. 대구시보는 경북도청 내 일반조선인 관사가 총사직하리라는 비사실적 기사를 공개하였는데 그러한 오보는 인민의 복리를 위함에 위반되고~’(영남일보 1946년 1월4일자)

대구시보는 군정청으로부터 일주일간 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군정 한인관리의 총사퇴를 보도한 때문이다. 기사가 나간 두 달 뒤 군정청은 적산관리 허가를 이유로 사원들의 반발도 아랑곳 않고 장인환을 관리인으로 선임했다. 군정청을 비판하는 기사에 대해 사장 해임으로 책임을 물은 것이었다. 1945년 10월 창간한 대구시보의 사장은 애초 윤홍렬이었다.

지역 신문인들은 허보사건이 일어나자 군정청이 선임한 대구시보 사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동업자 의식을 밀쳐내고 나름의 불편부당한 언론인의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대구시보의 흔적을 끌어다 신문의 사사(社史)로 둔갑시키는 언론역사의 왜곡에도 동업자는 침묵하고 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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