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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12] 임진왜란의 영웅 김여물(金汝)과 그의 아들, 그리고 4명의 열녀 [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선조 10년(15)

2017-11-27

문무 겸비한 수재…日 문헌 “왜군 향해 홀로 끝까지 싸우다 전사”

20171127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 있는 사세충렬문. 병자호란 당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열녀정신을 지킨 김여물 집안 여인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문이다. <출처=문화재청>
20171127
김여물은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에서 투신해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측 문헌인 회본태합기에는 그가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171127
김여물의 아들 김류는 종사관으로 충주를 드나들 때 자신의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에서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며 놀았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 위기에 처한다. 선조실록 133권, 선조 34년 1월22일 신유 두 번째 기사에는 우승지 김시헌이 김류의 무고함을 상소하는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1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장원방(옛 선산 영봉리)에서 태어난 김여물(金汝, 1548~92)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이름을 떨쳤다. 김여물이 장원방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버지 김훈(金壎)이 선산 망장촌(網障村,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대망리)에 장가를 들면서다. 이후 김훈은 장원방으로 불리는 영봉리로 이사해 정착했고 여물을 낳았다. 김여물은 1577년(선조 10)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에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하며 장원방의 또 다른 인재로 기록됐다. 벼슬길에 오른 이후 한때 정철(鄭澈)을 따른 무리로 몰려 파직을 당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시 발탁되어 전장에 나아갔다. 하지만 충주 방어에 나섰다가 신립(申砬)과 함께 탄금대에서 투신해 순국했다. 반면에 일본측 문헌에는 탄금대에 투신하지 않고 홀로 적진을 향해 돌진해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김여물의 후처 평산신씨를 포함해 며느리, 손자·증손자 며느리 등 4명의 부인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열녀로 존경을 받았다. 김여물의 아들 김류(金, 1571~1648) 역시 대제학을 비롯해 병조판서, 이조판서, 도체찰사, 삼정승 등 고위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벼슬길 오른 후 붕당정치 휘말려 파직
임진왜란 때 다시 발탁돼 전장에 나가
충주 방어 나섰다가 탄금대 투신 순국
日 회본태합기엔 자결 아닌 것으로 기록 

후처·며느리 등 4대 걸친 집안 여인들 
병자호란 나자 목숨 끊어 열녀로 존경


아들 김류, 부친에 대한 애틋함 남달라
인조에 아버지 정표해달라 간절히 청해
日사신이 詩文 청했을 때도 끝까지 거절


#1. 욕심이 없어도 궁지에 몰리나니

1577년(선조10) 9월9일, 알성시(謁聖試) 정축10년알성방(丁丑十年謁聖榜)이 치러졌다. 알성시는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소수의 인재를 선발하는 비정기 과거시험이었다. 이 시험에 당시 서른 살의 김여물도 응시했다.

선산 장원방 출신의 김여물은 정주목사(定州牧使) 김수렴(金粹濂)의 손자이자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김훈(金壎)의 아들이었다. 아울러 10년 전인 1567년(선조 즉위년)에 정묘식년시(丁卯式年試)에서 3등으로 급제해 생원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날의 알성시에서 김여물은 선발된 총 15명 중 갑과(甲科) 1등, 장원에 이름을 올렸다.

김여물은 문무를 겸비한 드문 수재였다. 특히 무(武)에서는 이론은 물론이고 무예의 하나인 궁마술(弓馬術)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하지만 구속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당연히 벼슬에 대한 욕심도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좌랑(佐郞), 정랑(正郞),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의 자리에서 성실히 책임을 다하였고, 충주도사(忠州都事)와 담양부사(潭陽府使) 등 여러 지역의 목민관으로도 소임을 다했다.

그러던 1591년 9월,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던 김여물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파직과 더불어 의금부에 갇힌 것이다.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가운데 선조의 눈 밖에 난 정철과 한 무리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억지였지만 권력의 바깥에 있었던 김여물에겐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힘이 없었다. 김여물은 아등바등하지 않았다. 실망하고 절망하는 대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던 중 이듬해인 1592년, 천지가 개벽할 일이 나라에 닥쳤다. 임진왜란이었다.



#2. 한(恨)을 품고 흐르고 흘러

왜군이 처음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4월13일 이후로 나라는 거센 바람 앞의 촛불 신세나 다름없었다. 최고사령관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은 김여물의 재능을 알고 풀어주기로 결단한다. 조선 군대가 연일 패전을 거듭하고 있는 마당에 군사적 책략에 밝은 김여물이 귀히 쓰일 거라는 확신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이 발 빠르게 나섰다. 신립은 북방에서 큰 공을 세운 적이 있어 조정이 크게 의지하는 인물이었다.

“김여물은 충성심이 깊은 데다 재능과 용기도 뛰어난 인재입니다. 저와 더불어 싸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류성룡이 허락하자마자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신립과 김여물은 4월24일 단월역(丹月驛, 현재의 충주 단월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상황은 최악으로 흐르고 있었다. 적은 조령을 넘어오기 직전인데 아군은 고작해야 훈련조차 되지 않은 백성들이 태반이었다. 이에 김여물은 적은 수의 병력으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수 있는 곳은 조령뿐이라며 배수진을 조령에 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신립은 조령 방어를 무리라고 판단하고 충주의 달천에 배수진을 칠 것을 명령했다. 이때 김여물은 패전을 직감하고 아들 김류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은 당연하다’며 편지로 유언을 남겼다.

이러한 가운데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다다른 왜군은 4월28일 새벽 개미떼처럼 새카맣게 밀고 들어왔다. 전열이 채 정비되지 못한 조선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김여물이 신립과 함께 적병 수십명을 사살하는 등 사력을 다했지만 끝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자결을 선택했다. 상관인 신립이 먼저 탄금대로 투신했고, 그 뒤를 따라 김여물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일본의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에는 그 정황이 사뭇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김여물의 죽음이 자결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당시 왜군의 기세에 눌린 병사들이 제각각 도망가는 와중에 김여물이 홀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검은 수염을 휘날리며 적토마를 타고 나타난 그의 한 손에는 길고 날카로운 도끼가 들려있었다. 그가 천둥처럼 외쳤다.

“내가 바로 김여물이다.”

순식간에 왜군 20여 명의 목이 떨어졌다. 빛을 가르는 듯한 움직임에 왜군들이 잠시 우왕좌왕했지만 김여물 혼자였다. 수많은 왜군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여물에게 힘이 떨어지는 기색이 보이자 왜군이 그를 잡아당겨 말에서 떨어뜨렸다. 결국 김여물은 왜군에게 목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통한의 죽음이었다. 조선측의 기록과 일본측의 기록이 사뭇 다르지만 김여물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의기로웠다.



#3. 네 사람의 열녀가 그의 가문에서

김여물이 장렬하게 전사했을 당시, 그에게는 첫 아내가 죽은 후 두 번째 아내 평산신씨와 아들 김류가 있었다. 이후 김류는 진주유씨와 혼인해 외아들 김경징(金慶徵)을 보았고, 김경징 또한 고령박씨와 가정을 이뤄 외아들 김진표(金震標)를 두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20대 초반의 김진표도 진주정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러던 1636년(인조 14)이었다. 또 한 번의 환란이 조선에 밀어닥쳤다. 병자호란이었다. 화급을 다투는 시점에 김여물의 아들이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류는 강화도 수비사령관으로 자신의 아들 김경징을 천거했다. 가장 믿을 만한 인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김경징은 강화도에 피란한 왕실과 백성의 안위는 물론이고 식량 배급과 같은 업무까지 진두지휘했다.

전세는 이번에도 조선 군대의 중과부적이었다. 급기야 청나라 군사들이 바다를 건너면서 강화도는 피란지가 아니라 격전지가 되어버렸다. 꼼짝없이 적의 손에 붙들리게 될 것을 직감한 아녀자들은 공포에 질렸다. 지아비들을 따라 피란 와있던 김여물 집안의 네 여인도 다르지 않았다. 급박한 상황을 직감한 김여물의 후처 신씨 부인이 며느리 유씨 부인을 비롯해 박씨 부인과 정씨 부인을 불렀다.

“어찌 가만 앉아 능욕과 치욕을 기다리겠느냐. 깨끗하게 죽자꾸나.”

부인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적의 손에 떨어지면 곱게 죽지 못할 거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신씨 부인은 젊디젊은 증손자며느리가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그새 여윈 작은 손만 어루만져줄 뿐이었다.

잠시 후 네 여인은 유언을 남기고 갑곶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단정히 절하고 차례로 뛰어내렸다. 물에 떨어지는 순간 벗겨진 하얀 머릿수건들이 바람에 날려 파도 위를 떠다녔다. 한겨울의 차가운 바다는 그렇게 여인들을 품고 또 품었다. 훗날 이를 알게 된 조정은 충신 김여물의 식솔답게 죽음도 불사한 그 뜻이 가상하다 하여 정문(旌門)을 내려 네 여인을 기렸다. 4대에 걸친 고부 열녀라 하여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이라고 불리는 이 정문은 현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 있다.



#4. 아버지의 이름으로

1593년(선조26) 안산에서 김여물의 허장(虛葬)이 치러졌다. 허장은 오랫동안 생사를 모르거나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경우에 옷가지나 유품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이른다. 김여물이 전사할 당시 끝내 유해를 찾지 못한 터였다. 외아들 김류는 서럽고 또 서러웠다. 고작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선비의 애끓는 곡이 한참을 이어졌다.

김류는 김여물의 아들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를 닦아세웠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서 3년 후인 1596년, 과거에 합격해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다음해인 1597년, 왜군이 휴전을 깨고 다시 쳐들어온 정유재란 때는 복수소모사(復讐招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이 되어 호서와 영남 지방에서 큰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왜란의 끝이 보이던 1598년(선조31) 2월이었다. 사헌부에서 느닷없이 김류를 고발했다.

“김류가 종사관으로 충주를 드나들 적에 탄금대에서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며 걸판지게 놀았다고 합니다. 탄금대가 어떤 곳입니까. 그의 아비 김여물이 전사한 곳입니다. 자식 된 자로 통곡하며 지나가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랍니까.”

모함도 그런 모함이 없었다. 가슴에 어떻게 묻은 아버지인데, 그 아버지가 순절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놀 수 있단 말인가. 파직이 문제가 아니었다. 김류는 억장이 무너져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김류와 함께 지내며 김류의 일거수일투족을 봐왔던 김시헌이 나섰다.

“아닙니다. 김류는 탄금대 말만 나와도 흐느껴 울었습니다. 차마 땅도 밟지 못하겠다며 걸음마다 힘겨워했습니다. 그런데 기생을 끼고 풍류를 즐겼다니요. 도대체 김류의 무엇에 원한이 맺혀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이로써 김류는 누명을 벗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복직됐다.

실제로 아버지 김여물에 대한 김류의 애틋함은 남달랐다. 1639년(인조 17) 아버지를 정표해달라고 간절히 청해 인정을 받은 것이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1642년(인조20)에는 어명을 거역하기까지 했다. 조선을 찾은 일본사신이 새로 지은 본국의 사당에 두겠다며 시문(詩文)을 청하였을 때, 인조가 글을 지을 자 중의 하나로 김류를 지목한 일이 발단이었다. 김류는 끝내 거절했다. 왜란으로 아버지를 비참하게 잃었는데 그럴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김류는 크고 작은 일에 휘말리면서도 꾸준히 관직을 이어갔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우면서는 대제학을 비롯해 병조판서, 이조판서, 도체찰사, 삼정승 등 고위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김류가 1648년(인조26)에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 그에게 내려진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그리고 1784년(정조8)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데 이어 1788년(정조12)에는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공동 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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