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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혁의 중년 남자 이야기] 중년, 예술을 만나다(상)-미술

2017-12-08

나를 홀린 클림트의 ‘유디트’
김영하 소설 ‘나는 나를…’ 속 그림 3장
개중 강렬한 인상의 클림트作‘…유디트’
그 뇌쇄적인 눈빛에 끌려 그림의 세계로
클림트서 시작해 서양미술사까지 공부
1박2일 미술관투어 위한 서울行도 강행
돌아오는 길 머리서 떠나지 않던 그림들
다음날 동네 작은 화실 등록 ‘미술 入門’
일 마치면 헛헛한 삶과 예술 열병 치유중

[이정혁의 중년 남자 이야기] 중년, 예술을 만나다(상)-미술
서울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다빈치 얼라이브 기획전을 찾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1998년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여주인공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심은하다. 그녀에게 사족이 필요하던가? 혹시 안 본 분들을 위해 영화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에서 떠오르는, 여자는 미술관을 좋아하고, 남자는 동물원을 좋아한다는 가정이 오늘 이야기의 단초이므로.

이러한 극단적인 이분법을 모든 인류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미술가들은 대부분 남자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미술을 전공했거나 그 분야에 지극한 관심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고, 제 발로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는 남자들은 시장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남자만큼이나 이질적인 형상이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말이다.

음주가무에 신물이 나고, 격렬한 운동은 부상이 걱정되며, 골프·낚시·등산의 3대 아저씨 취미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중년에게 새로운 놀이가 필요했다. 어릴 적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나이 들어서는 먹고살기 바빠서 늘 한쪽 구석에 밀려있던 나만의 은밀한 로망. 중년 남자 이야기, 이번에는 예술 그중에서도 그림에 빠진 중년의 열정에 관해 적어본다.

[이정혁의 중년 남자 이야기] 중년, 예술을 만나다(상)-미술
화실에서 데생을 배우는 모습.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으면서다. 소설은 세 장의 그림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그중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건 클림트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이하 유디트)다. 클림트의 ‘키스’는 삼척동자도 한번쯤 봤을 만큼 너무나 유명한 그림이지만, 유디트는 생소했고 충격적이었다. 몽환적이며 뇌쇄적인 유디트의 눈빛은 중년의 한 남자를 그림의 세계로 빨아들였다.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무지렁이를 벗어나는 길은 공부밖에 없다. 클림트와 관련된 책과 그림첩을 사서 읽고 감상했다. 빈 분리파, 인상주의 같은 용어들이 궁금해서 서양미술사를 공부했다.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서부터 현대미술까지 맥락을 훑어보면서 시선을 끄는 몇몇 화가들을 알게 되었다. 카라바조, 모딜리아니, 에곤 실레 등.

특히 상식을 파괴하는 카라바조의 그림과 그의 기행들은 동경의 대상마저 되었다. 어릴 적 눈물 흘리면서 보았던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오가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어했던 그림이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였다는 사실도 마흔이 넘어서야 처음 알았다. 눈앞에 펼쳐진 미술의 세계는 지금껏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던, 아는 체하려는 배부른 자들의 고유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략적인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유명한 작품들을 책에서나마 접하고 나니 그림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때마침 국내에서 다빈치 특별전이 열렸다. 주말 일정을 미술관 투어로 잡고 서울로 향했다. 첫 목적지는 서울시립미술관. 자의에 의해서는 난생 처음 가보는 미술관이다. 생각보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제목으로 전시된 ‘천경자 컬렉션’이 인상 깊었다. 2015년 세상을 떠난 한국화의 대가 천경자 화백. 그녀의 작품 중에 35마리의 뱀을 그린 ‘생태’(1951년 작)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오후에는 서울 인사동의 화랑을 둘러보았다. 뜬금없이 그림에 빠진 아빠의 손을 잡고 화랑을 첫 경험하는 아이들의 시선도 사뭇 진지했다.

이튿날에는 고대하던 다빈치 특별전을 보기 위해 용산전쟁기념관으로 향했다. 조조할인을 받아 만원의 입장료를 내고 다빈치를 만나러 갔다. 다빈치 하면 가장 먼저 모나리자를 떠올리지만 내가 보고 싶던 그림은 ‘암굴의 성모’라는 작품이다. 루브르박물관과 런던박물관에 전시된 작품 두 가지를 동시에 비교해 보도록 전시되어 있었다.

40여 분쯤 그림 앞에서 머물렀다. 가족들은 다른 작품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나는 그 자리에 뿌리내린 듯 혹은 서성이며 그림에 홀려 있었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내부가 채워지는 느낌. 붓질하는 다빈치를 마치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 책에서만 보던 원근법의 시초를 코앞에서 감상하는 감회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신비한 경험이었다.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그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배 나온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예술에 대한 열병을 앓게 된 것인가? 열을 발산하지 않으면 화가 되어 몸이 상하는 법이다. 다음날 동네 미술학원을 알아보고 직장인을 상대로 하는 작은 화실에 등록했다. 종이와 연필을 받아 쥐는 순간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릴 적에 그림 잘 그린다는 이야기를 좀 들었던 편이다. 하지만 예술이란 늘 배고픈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은 감수성 풍부한 아이에게 세뇌가 되어 박혔다.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장남에게 글쓰기는 사치였다. 그렇게 소질과 적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직업을 택했고, 그대로 흘러가다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안정된 직장, 평온한 가정, 그리고 적당한 부와 명예. 쌓아놓고 보면 나름 열심히 살아온 흔적이다. 그런데 헛헛하다. 삶의 자취에 무게는 있을지언정 질량이 부족하다. 나를 그리는 외형선은 두껍지만 막상 그 안은 공허하다. 하루하루 터벅거리며 걸어가던 인생길에 그림이 나를 찾아왔다. 텅 빈 내 안으로 선과 색이 햇살처럼 쏟아져내린다.

일을 마치고 화실을 찾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하다. 아직은 데생 초기 단계 연습이지만, 흰 종이 앞의 내 모습은 정열적이며 생기가 넘친다. 무엇보다 즐겁고 행복하다.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변화를 주저하기에 중년은 아직 이르다. 우리에겐 아직도 살아가야 할 숱한 날들이 남아 있다. 미루거나 잊고 있던 내 안의 목소리에 이제 귀를 기울여보자.

얼마 전 적금을 하나 들었다. 김생민의 ‘영수증’이 자극이 되긴 했지만, 진짜 이유는 바로 좋아하는 작품들을 직접 보러 가기 위해서다. 파리, 피렌체, 비엔나에 가서 매혹적인 그림을 만나고 싶다. 지금도 죽기 전에 봐야 할 명화의 목록이 늘어나고 있다. 중년의 나이에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는 명분으로 이만큼 값지고 고상한 에너지가 또 있을까? 일상에 짓눌렸던 어깻죽지에 꿈이라는 날개가 돋아나고 있다.

칼럼니스트 junghyuk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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