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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단상] 잊어버림에 대하여

2017-12-16
[토요단상] 잊어버림에 대하여
홍억선 한국수필문학관장

짧은 일정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글을 쓰는 몇몇 분과 함께 이웃나라 문학관의 모습이며, 문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기행이었다.

히메지문학관은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며 조금씩 보이는 건축물은 주변 마당을 연못으로 만들어 놓아서 그런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몽환적 느낌을 주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노출콘크리트가 주는 기하학적 풍광이라고 생각하니 역시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일었다. 그러나 원통형 복도를 지나 전시실에 들어서면서 건축미에 대한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전시실 벽에는 히메지 출신 문인들의 사진이 줄지어 현수막으로 걸려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역의 작가들이 죽어서도 저렇게 되살아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이 지역 사람들의 기억이 부러웠다.

성당 건물을 개조하여 만든 좁디좁은 고베문학관에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전시되어 있는 ‘미나토 고베의 문학풍경’이나 ‘고베 문학지도’ ‘고베의 책장’에는 고베를 무대로 활동한 지역 작가들의 시대적 발자취가 치밀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대단한 사람의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지역, 같은 공간을 잠시 공유했던 예술인에 대해 그 인연을 잊지 않겠다는 배려요 예우였다.

다음날은 윤동주의 모교이자 시비가 있는 도시샤대학을 찾았다. 윤동주는 한글로 시를 쓴 사상범으로 몰려 후쿠오카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옥사한 저항시인이다. 그가 죽은 지 반세기가 되는 해에 대학교 교우모임이 중심이 되어 교정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키 낮은 겸손한 시비였으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결코 그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표석이기도 했다.

그런데 윤동주의 또 다른 시비가 지난 10월28일 교토 우지시에 세워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는 짧은 신문기사 하나를 손에 들고 GPS에도 뜨지 않는 길을 찾아 헤맸다. 가이드를 닦달하고 운전기사를 재촉하여 좁고 외진 길가, 한 발 움직이면 저 아래로 미끄러질 것 같은 시즈가와(志津川)의 우지강(宇治川) 언덕에서 그의 시비 ‘새로운 길’을 만났다. 이 시비가 감동적인 것은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의 손이 아니라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의 순수한 뜻과 정성으로 세워졌다는 데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시비를 세울 공간을 허락하지 않은 지자체를 무려 12년 동안 설득하여 기어이 이룬 결실이라는 점이다.

시즈가와는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사진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이다. 도시샤대학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는 귀국을 앞둔 1943년 6월 학우들과 이 지역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송별회를 했고, 우지강의 한 구름다리 위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를 알게 된 지역민들이 2005년부터 기념비 건립을 추진해 왔고, 시인이 죽은 지 72년 만에 그 작은 인연을 잊지 않기 위해 끝내 시비를 세웠다. 내 부모도 아니고, 형제도 아닌, 타국에서 건너온 젊은 청년을 기억해서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잊히는 것이라고 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병들어 누워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친구·주변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것이라고 했다. 죽어서도 잊히는 것이 두려워 무덤을 만들고 또 자손들을 모아 제사를 지내게 한다는 말도 있다.

요양병원 마당에 바람개비를 세워둔 곳이 많다고 한다. 기억을 잃어버린 치매 환자가 종일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기억의 한 끄트머리를 희미하게나마 붙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 처절하고도 간절한 눈을 본다면 우리가 우리의 것들을 너무 쉽게, 그리고 빨리 잊어버리지는 않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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