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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동화요변에 미쳐 살아온 恨…비취색과 붉은색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2018-05-18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도예가 운당 김용득

20180518
고려 때 반짝 꽃을 피우고 그 이후로 명맥이 끊어진 동화요변 도자기. 유약에 구리 가루가 들어가 한국에서는 동화로 불리지만 일본에서는 주사처럼 붉은 돌가루를 유약 재료로 사용해 진사로 불린다. 운당 김용득은 비취색과 동이 만든 붉은색을 불의 양과 온도 조절로 한국 동화 도자기의 신지평을 열었다. 교과서에도 없던 동화 전용 유약 제조법은 그만의 특허기술이다. 자신이 만든 동화 화병을 보고 있는 그의 표정에는 가마의 불기운이 여전히 스멀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201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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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두주불사였던 운당 김용득. 사람을 너무 좋아해 작업이 없을 때는 술과 망중한을 즐기기도 한다. 이젠 건강을 생각해 차를 가까이한다.

옆집 옹기장인 외조부, 가마는 놀이터
16세에 ‘방곡도예’서동규 선생에 배움
물레대장·불대장 등 일인다역 감내


나만의 동화 찾기
비취·붉은빛 혼융 도자기 구현 욕망
유약에 구리가루 들어가는 한국동화
日 진사, 붉은 돌가루 유약재료 사용
불 스스로 문양 그리게 하고싶은 생각
동화 도자기 전용 유약·디자인 등 연구
기름가마는 맞지 않아 장작가마 축조

좁은 주둥이 대형달항아리 처음 빚어
봉하마을로 내려온 노무현 前 대통령
불쑥 찾아와 부부상 구입해간 일화도



◆도처가 내 스승

16세 때 결정적인 스승을 만난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에서 ‘방곡도예’를 이끄는 방곡 서동규 선생이다. 흙을 다스리는 ‘수비’ 등 도예의 전 과정을 익힐 수 있었다. 때로는 ‘변수’(가마 전체 일을 도맡아 보는 총감독), ‘물레대장’(성형 감독), ‘질꾼’(흙을 밟는 사람), ‘불대장’(가마에 불 때는 사람) 등 일인다역을 감내했다.

방곡은 민영 도자기의 대표 산지인 경북 북부 지방의 전통가마를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 도예명장이다. 나는 5년간 그곳에서 도예의 기초를 완전히 습득했다.

내 움직임을 눈여겨본 ‘토광도예’의 종산 배종태 선생이 부르셨다. 종산은 조선 찻사발을 재현한 분이다. 내 고향인 진례에 도예촌 기반을 닦아주고 나중엔 한·일 공동으로 도예원을 설립한 기능보유자였다. 1990년대 이후는 미적으로 승화된 동화 항아리 등도 만들었다. 나는 기존 도자기에서 벗어나 나만의 동화 찾기에 나섰다.

◆동화의 세계 속으로

한때 가을하늘은 내 화두였다. 고려 도공은 거기서 비취빛만 가져간 것 같다. 난 비취빛 하늘과 오로라처럼 파고든 석양의 붉은빛이 혼융된 동화 도자기를 구현해보고 싶었다.

신라는 ‘토기’, 고려는 ‘청자’, 조선은 ‘백자’에 올인을 했다. 하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는 사특하다고 해서 붉은 기운을 멀리했다.

동화의 주성분은 황화수은(HgS). 진한 붉은색을 띠고 다이아몬드 광택이 난다. 수은의 원료이고 붉은색 안료와 약재로도 쓴다. 단사(丹砂) 주사(朱砂)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청자에서 동화를 그릴 때는 오늘날처럼 산화구리를 사용하지 않고 ‘공작석’을 썼다. 공작석은 구리를 함유한 광물. 여기에 함유된 구리성분이 자연적으로 푸르게 산화되기도 하고 붉게 환원되기도 하여 공작새의 깃털처럼 현란한 색을 띤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중국에서는 도자기에 붉은색을 연출하는 것을 ‘유리홍(釉裏紅)’이라 한다. ‘유약 밑에 붉은 그림이 있다’라는 뜻이다. 즉 산화동으로 그림을 그린 후 다시 투명유를 시유하여 구워낸 것이다. 이 기법은 중국 명나라 때 번창하였다.

이후 도자기 제조법이 발달하면서 자연 광석물인 공작석이 아닌 산화구리를 사용하여 동화를 연출하게 된다. 조선 사기장들은 동화를 주점사기와 진홍사기라 불렀다. 일본강점기 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국내에서 발견한 동화를 ‘조선 진사(辰砂)’로 명명한다. 현대에 와서 진사는 동화로 바뀌어 불리고 있는 추세다.

실제 나의 동화와 일본 진사를 비교하면 색의 다양성과 심도에 있어서도 현격하게 차이를 보인다. 나는 1천250~1천300℃에서 굽는데 일본은 훨씬 낮은 온도에서 굽기 때문에 나처럼 다섯 가지 오방색이 균분하고 투명한 붉은색을 생각할 수가 없다. 내 동화는 진사의 연장이 아니라 나만의 창조품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도자기문화는 너무나 ‘반동화적’이다. 너무 서구화된 자기와 찻사발만 난무한다. 어린시절 동화에 미쳐 살아온 나의 한을 풀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림·글씨·음양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불 스스로 도자기에 기묘한 문양을 그리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유약·가마공학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절대적이었다.

◆동화 유약 제작스토리

나만의 유약이 절실했다. 당시 동화 1㎏이 너무 비쌌다. 그 덕택에 동화유약을 제조하는 기술과 기본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무렵 ‘분청철화유약’도 건드렸다. 하지만 후배가 이 비법을 도용해버렸다. 덕분에 동화 연구에만 더 몰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화기법은 고려시대(12세기 후반) 때 세계 최초로 개발되었다. ‘청자상감진사채동자포도당초문(靑磁象嵌辰砂彩童子葡萄唐草文)주전자’와 13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 제133호인 ‘청자진사채연판문표형(靑磁辰砂彩蓮瓣文瓢形)주전자’ 등이 대표격이다.

소나무재·참나무재·잡재와 추가로 6가지 성분(미공개)을 가미하여 혼합재를 만든다. 그리고 산화구리와 8가지 성분을 배합하면 기본 유약이 완성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 형언할 수 없는 형극의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1989년 ‘금지도예’로 독립했다. 디자인 연구까지 세밀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작품은 동화요변호·동화요변장병, 현대적 감각이 돋보인 부부상 등이다. 동화요변호의 전신인 달항아리의 주둥이 지름은 약 10㎝. 그런데 곡선미가 별로였다. 흰색이나 노란색이 묻은 저급품이었다. 현재 같은 적청(赤靑)의 색은 불가능했다.

고작 결정유와 동화유를 혼합해 사용했다. 그래서 붉은색이 탁했다. 이유가 있었다. 화력이 약한 기름가마이기 때문이었다. 시름에 젖어 술독에 빠졌다. 흙일을 끝내고 싶었다. 영 죽으란 법은 없었다. 불현듯 기름가마가 동화요에 맞지 않을 것 같았다. 동화요에 맞는 장작가마를 축조했다. 그제서야 비취색과 붉은색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운당도예 개막

금지도예 시대를 접고 1994년 현재 자리에서 ‘운당도예’로 새출발을 했다. 지인 세분이 가난한 날 위해 2천만원씩 빌려주었다. 내 성실성과 작품성 때문이라고 여겼다. 진례면 송현리의 산판까지 직접 가서 소나무를 채취하였다. 장작 가마에 첫 불을 넣었으나 실패였다. 유약이 날아가 보기조차 흉했다. 1년간 봉통의 길이도 재조정해보고 유약 연구도 새로 했다. 모두들 운당이 불 잘 땐다고 야단이었는데 모두 빈말이 되고 말았다. 결국 불을 너무 빨리 달군 게 약점이었다. 6시간 안팎의 봉통 장작불을 12시간으로 증가시킨 것이 결정타였다.

동화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동화작품용 가마가 필수적이다. 가마 바닥을 특별시공하였다. 1m 이상 파내고 자갈 40㎝, 그 위에 모래 10㎝ 정도 덮은 후 다시 30㎝ 가량 황토를 고루 뿌린 다음 내화벽돌을 장판처럼 깔고 마지막으로 백토와 황토의 혼합토로 평편하게 했다. 일반 사기장들은 지속적으로 땔감을 넣어야 고온을 유지하거나 온도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땔감을 연속적으로 넣는 것보다 어느 정도 땔감을 넣고 난 다음 불자락이 생기고 이게 충분히 연소할 때 더 높은 온도를 얻을 수 있다. 비로소 불의 혓바닥(火舌)이 붓으로 변하게 되고 결국 내가 아니라 불이 화(동화)를 완성하는 것이다.

가마는 모두 5개 봉으로 구성돼 있다. 맨처음 장작을 때는 곳을 ‘봉통’이라고 한다. 각 칸 측면에 불창이 뚫려 있다. 12시간 봉통에서 불을 때면 셋째 칸까지 불이 간다. 측창으로도 장작을 넣어 불을 키운다. 가마가 다섯 봉우리라면 봉통 11시간 내외 등 17시간 정도 소요된다. 첫째와 둘째 칸에는 일반 찻사발과 다기류 등을 넣고, 셋째 칸과 넷째 칸은 동화다기와 동화항아리 등 대표적인 작품을 넣고, 마지막 다섯째 칸은 항아리와 찻사발을 넣는다. 같은 작품이라도 성형이 우수한 것은 3∼4칸에 넣고, 그렇지 않은 것은 첫째 칸이나 다섯째 칸에 넣는다. 최고의 작품은 각 창불에서 마지막 5∼10분 사이에 결정된다. 불을 세게 때면 최상의 색상을 연출할 수는 있지만 유약이 흘러내려서 실패할 확률이 많다. 불을 조금 덜 때면 흘러내리지는 않지만 색상이 화려하지 않다. 땔감도 굵은 것을 먼저 넣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는 걸 넣는다. 이렇게 칸당 16회 정도 땔감을 넣었다가 쉬었다가를 반복한다. 그러면 공기의 차단을 최대화함으로써 초고온의 불꽃이 탄생하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방문

1995년은 참으로 나에게 감개무량한 해였다. 14세에 소년 도공이 된 지 24년 만에 ‘제1회 운당 김용득 도예전’을 연 것이다. 모두 7번 개인전을 가졌는데 7회째는 대구 수성아트피아에서 전시했다. 내게 특별한 동화 작품은 바로 3종류의 부부상이다. 1995년 김해시 주관으로 결혼을 미처 올리지 못한 저소득층 10쌍의 합동결혼식 선물용으로 동화작품을 기증한 인연 덕분에 ‘금슬 ·부귀·해로 부부상’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평소 내 작품에 관심이 많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온 직후 불쑥 찾아와 그 부부상을 구입해갔다.

지난 세월 참으로 다양한 도자기를 빚었다. 그걸 합치면 크게 두 버전이 된다. 그중 하나가‘동화요변호(銅畵窯變壺)’. 일명 ‘동화 버전의 달항아리’다. 웬만해선 그렇게 굽히질 않는다. 주둥이 지름이 약 3.5㎝, 내경은 0.5㎝, 높이는 1.5㎝. 기술이 없으면 좁은 구멍이 작아 압력 때문에 터져버린다. 두께의 균형이 1㎜만 뒤틀려도 안된다. 이렇게 좁은 주둥이의 대형 달항아리는 내가 처음인 것 같다. 이제 숙업은 폄훼받는 동화문화를 세계화하는 것이다. 그걸 위해 현재 한국인력관리공단에 ‘대한민국 명장’(도자공예 부문)을 신청해놓았다. 자기 길을 찾은 이의 얼굴은 그렇게 재밌지도 그렇게 숭고하지도 그렇게 당당하지도 않다. 뭔가 모를 비애스러운 구석이 있다. 기술이 장인의 반열에 이르고 장인의 감각이 천지를 희롱할 정도가 되면 예술의 경지에 들겠지. 그런 예술일수록 더 겨냥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이 부귀공명에 묶인다면 하늘이 그런 자에게 천품을 줄 리 만무하다. 하여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자는 폼생폼사하려는 욕망을 죽여야 한다. 새로움을 찾지 못하는 예술가도 ‘비극’이지만 새로움을 찾아도 더 새로움의 미궁속으로 파고들어야만 하는 예술. 얼마나 처참한 아름다움인가. 내 동화의 길 또한 그러할 것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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