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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장우석의 電影雜感 (전영잡감)] 관부재판 다룬 민규동 감독 신작 ‘허스토리’

2018-06-29

“위안부 할머니의 최초 증언…가슴속 바윗덩어리 이야기로 풀고 싶었다”
‘허스토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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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 스틸 컷. 왼쪽부터 이용녀·예수정·문숙·김해숙·김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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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재판에 나선 할머니들 실제 모습.

민규동 감독의 신작 ‘허스토리’가 개봉 전 공개한 론칭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었다. “관부재판을 아십니까?” 관부재판(關釜裁判)은 일본을 상대로 재판까지 나서 일부 승소를 거둔 의미 있는 싸움이었다. 관부재판의 시작은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 최초증언 기자회견이다. 이후 1991년 10월19일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가 부산지역에 정신대 신고전화(당시 명칭)를 개설해 1991년 10월부터 12월까지 부산 신고 전화로 8명이 신고했으며, 그중 4명이 관부재판에 참여하게 된다. 이어 1992년 5월29일 변호사 한국 방문과 이후 3회에 걸쳐 김문숙 회장과 함께 피해자 청취 조사가 이뤄졌다. 본격적인 재판은 1992년 11월14일 변호사에게 소송 위임장이 전달되고, 1992년 12월25일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 고소장이 제출되면서다. 1993년 9월6일부터 1997년 9월29일까지 총 20회의 구두변론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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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재판 이야기
1991년 부산신고 전화, 4명 재판 참여
10명의 원고단…6년간 스물세번 재판
日 상대 일부 승소…亞 11개국 중 유일

관객이 사건 체험하기를 바라는 마음
편집대신 롱테이크, 날것 그대로 담아


관부재판은 1998년 4월27일 판결이 났다. 판결문에는 기본적인 인권 침해를 했다는 내용, 피해 회복의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고 되어 있다. 이와 함께 “1995년 8월의 관방장관 담화 이후 그 의무가 배상입법을 해야 하는 헌법상의 의무로 구체화되었는데도 그 입법 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위안부였던 원고들에게 손해를 끼쳤으므로, 피고국은 위자료로 각 30만엔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시됐다. 여기에 “그러나 근로정신대원인 원고들에게는 그 피해를 경시하지 않지만, 그러한 입법 의무가 없어서 위자료 지불의 의미가 없다. 또 피고국에는 공식사죄의 의무까지는 없다”고 명시됐다. 그래서 일부 승소 판결이다. 무려 6년의 시간 동안 이뤄진 재판에 참여한 원고는 총 10명으로 1992년 12월에 5명, 1994년 3월에 1명의 원고가 추가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인, 근로정신대 피해자 7인이 원고단이다. 관부재판에 나섰던 10명의 원고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보상 판결을 받아냈다.

‘허스토리’는 지난해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던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의 성공이 없었다면 아마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전히 많은 관객에게 ‘컬트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 공동연출)부터 ‘내 아내의 모든 것’과 ‘간신’, 그리고 이번에 ‘허스토리’까지 민 감독은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한국 영화계에서 차근차근 만들어왔다. “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행동은 내 가슴속에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달아주었다. 그 무게감을 어떻게든 이야기로 표현해보고 싶었지만 매번 좌절 속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긴 시간 마음의 빚으로만 남았었는데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게 ‘허스토리’를 연출하게 된 계기란다. 민 감독은 ‘간신’ 이후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전역에서 벌어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궤적을 쫓아가며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작업하던 중 인생을 바쳐가며 할머니들과 함께 싸웠던 관부재판의 이야기를 새로이 발견하고 ‘그 잊힌 작은 승리의 흔적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커다란 의지의 서사를 찾아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영화는 1990년대 6년간 관부재판을 이끈 원고단 단장 문정숙(김희애)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문 단장은 여행사 사장으로 넉넉하고 편하게 살다가 위안부 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관부재판에 온몸을 던지는 인물이다. 그는 왜 이렇게 열심히 나서서 일하냐는 후배의 질문에 “부끄러버서. 내 혼자 잘 먹고 잘산 게”라고 답한다. 그런 의미에서 ‘허스토리’는 법정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주인공뿐 아니라 우리 역시도 아직 성장이 필요한 것 아닐까. 민 감독은 관객이 직접 이 사건을 체험하길 바랐던지 클로즈업을 최대한 자제했다. 클로즈업은 즉자적 분노를 일으키기는 쉬우나 무엇 때문에 분노했는지 놓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감정이입의 무기를 남용하는 대신 배우들의 연기를 최대한 살리는 연출을 했다. 편집 대신에 롱테이크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줬다. 촬영 당시 배우들에게도 감정을 폭발시키지 말라고 했다는 후문이다. 그래도 세대를 아우르는 배우들이 선보이는 열연은 관객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충분히 전하고도 남는다.

지난 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치권이 일제히 애도를 표하는 가운데 정부가 김 전 총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해 논란이 일고 있다. 무궁화장은 국민훈장 가운데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이다.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을 간첩이나 빨갱이로 내몰아 고문하거나 죽이고, 유신독재하에서 국무총리와 집권당의 대표를 맡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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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일협정 뒷거래를 주도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피해자들을 고통 속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래서 혹자는 전범국인 일본이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면 김 전 총리가 있다고도 한다.

김 전 총리의 발인이 있던 지난 27일 ‘허스토리’가 개봉한 것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영화 마케팅 차원에서 일부러 맞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1990년대 후반 당시 동남아 11개국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위안부 재판이 소송 중이었는데 일부 승소 성과를 거둔 것은 관부재판이 유일하다. 그러나 2001년 일본 정부의 항소로 열린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패소했으며, 2003년 대법원에서 항소를 기각하면서 패소가 최종 확정됐다. 일본 정부의 책임을 끝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 관부재판을 다룬 ‘허스토리’를 꼭 봐야 하는 이유다.

독립영화감독·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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