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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맹의 철학편지] 우리 삶 얽어매는 법을 거부하고 새롭게 법을 정립하는 것이 시민의 힘 아닐까

2018-08-17
20180817
20180817

대법원장이 청와대와 법을 두고 거래를 하는 동안 KTX 여승무원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사법부의 독립이 민주체제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말하던 그와 그의 ‘정의’ 때문에 적잖은 이들이 감옥에 갇혔다. 우리는 법이 정의의 여신인 ‘디케(Dike)의 저울’처럼 공정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법은 공정하지 않았다.

태형아, 법이란 무엇일까? 노동자들의 권리인 파업. 그런데 그걸 했다는 이유로 회사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단다. 수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거나 고통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을 거야.

주변의 변호사들에게 물어봤어. “도대체 이게 말이 되냐”고, “법이 뭐 이러냐”고. 그러나 그들도 그저 답답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어. “도대체 이 나라의 법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지. 그러자 반 농담으로 그러더구나. 자기들은 법철학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법은 인간에 의해 제정되거나 만들어진 법 일반을 의미하는 ‘실정법’을 주로 의미하지만, 실정법의 자기 근거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순환논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 그래서 철학자 데리다(1930~2004)는 ‘법의 힘’이란 책에서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토대·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폭력들이라고 표현해. 데리다는 앞의 책에서 몽테뉴(1533~92)를 인용하면서 법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신용을 얻으면서 존속되고 있다고 말해. 이것이 바로 법이 가지는 권위의 신비한 토대지. 그것들은 이것 외에 어떤 토대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 법관이었던 몽테뉴는 “법으로서의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했어.

‘신용’이라는 이 말을 따라가자면 우리나라는 참 문제가 많아. 2015년의 통계 조사에 의하면 OECD 국가의 사법부 신뢰도 평균은 54%인데 한국은 그 반인 27%에 불과해. 우리 뒤를 콜롬비아·칠레·우크라이나가 뒤쫓고 있더구나. 법의 근거를 권위에 대한 신뢰에서 겨우 찾았는데 이마저도 무너지게 생겼구나.

다시, 법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데리다는 하이데거(1889~1976)의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글을 인용하면서 정의, 법, 심판, 판결 등을 의미하는 디케는 원초적으로 갈등·불화·투쟁 등을 의미하는 ‘에리스(Eris)’라는 것, 곧 불의를 의미하는 ‘아-디키아(A-dikia)’이기도 하다고 해. 이 논법은 발터 베냐민(1892~1940)의 글 ‘게발트(Gewalt)에 대한 비판’이 대표적이지. 여기서 게발트는 폭력과 적법한 권력, 정당화된 권위 모두를 뜻한단다.

베냐민은 법이란 것은 본질상 폭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폭력 없이는 자신을 보존할 수 없다고 해. 그리하여 법은 정의의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법을 통해 정의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는 거지. 좀 놀랍지? 그에 따르면 ‘법과 질서가 대한민국이고 그 속에서 어떠한 불법과 폭력도 용인될 수 없다’고 표현하는 것은 자기모순이 되어버려. 일본 제국주의의 법 바깥에서 유신헌법과 군부독재의 바깥에서 그 법질서를 부정하고 투쟁하면서 새로운 법을 정립하려는 노력이 이뤄져 왔어. 결론적으로 현재 법은 폭력의 또 다른 구성체라고 볼 수 있지. 베냐민의 논리에 입각한다면 대한민국의 질서도 폭력을 통해 구성되어온 셈이야.

베냐민은 이를 법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에서 ‘법 정립적 폭력’이라고 불러. 가령 파업권은 법 보존적인 상태에서는 불법이 되지만, 법 정립이라는 역사적 단계에서 본다면 정당하다는 것이지. 그러므로 현재의 부르주아 국가와는 별개의 폭력권을 주장하는 노동자 주체는 새로운 법을 정립하고자 하는 법 정립적 폭력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야. 물론 최초로 법을 구성하기 위한 폭력은 ‘법 보존적’, 다시 말해 법을 보존하고 그를 독점하려는 기성의 폭력으로 전환되면서 약화되고 그래서 자연 법 보존적 폭력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념화되기도 하겠지만 말이야.

좀 과격하게 느껴지지? 물론 베냐민은 연이어 좀 더 발전된 이론을 발전시키지만, 오늘은 지면 관계로 여기까지만 설명하자. 다만 내가 오늘 너에게 법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법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자는 뜻에서야. 판·검사와 변호사가 되기 위한 법 공부가 아니라 우리 삶의 조건으로서의 법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야. 우리 헌법 공부도 좋은 공부가 될 거야.

화석화되어 우리의 삶을 얽어매는 법이 아니라 다수로서의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법체계를 구성해내야 하지 않겠니. 형식적으로 법을 만드는 곳은 국회이지. 그 법을 지키는 곳은 법원이지만 그 법이 기존의 세상을 보존하려는 이데올로기이기만 할 때 그것을 거부하고 새롭게 법을 정립하는 것은 우리 시민들의 힘이 아닐까 해. 데리다의 글은 잘 안 읽히지만 그래도 데리다가 지은 ‘법의 힘’(진태원 역. 문학과지성사 간)을 도서관에서 빌려보렴. 그나저나 제대로 된 법철학 책은 언제 볼 수 있을는지…. 시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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