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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칼럼] 어느 여름날에

2018-08-31
[조정래 칼럼] 어느 여름날에

올여름 날씨는 유난스럽다. 시나브로 나이가 들면서 기후 변화에 민감해졌음을 감안하더라도 폭염은 대지를 태울 정도로 무서운 기세였다. 설상가상 태풍은 ‘허풍’이나 ‘졸풍’으로 둔갑하며 기상청을 ‘구라청’으로 ‘디스’시킨다. ‘솔릭’은 바람만 잔뜩 몰아오고, 때늦은 장맛비는 출근길 시민들의 발목을 잡는다. 155㎜의 비에 도로 곳곳이 침수되고 교통이 마비된다. 천생 불의 도시, ‘대프리카’ 모습이다. 기상 이변이 지구촌의 보편적 현상으로 굳어진지 오래, 이제 물의 도시 대구에 대한 준비도 서둘러야 하겠다. 계절은 어김이 없어 장맛비에 이은 선선함은 폭염의 기억을 희미하게 하는 대신 망각과 적응력을 눈부시게 한다.

모처럼 길게 내리는 비가 길을 나서게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우산을 들고 구민운동장으로 향했다. 평소 새벽부터 붐비던 운동장이 모처럼 한산하다. 비도 막지 못하는 서넛의 운동 마니아들에 섞여볼까 하다 공원 산책으로 발길을 돌린다. 범어공원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비를 맞고 서 있는 시비(詩碑)와 마주한다. 시를 음미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다. 평소 선명하던 음각(陰刻) 글씨가 빗물로 채워졌는지 흐릿한 것도 괜찮다. 안력을 돋우니 지력까지 배가되는 기분. 객들도 없고 호젓한 게 청승맞다고 지청구할 사람도 없고 아무런 머쓱함도 없이 애오라지 ‘멜랑콜리’에만 빠져 시심(詩心)에 젖어 본다.

‘도시의 변두리 빈터에/ 들국이 피어/ 바람에 한들거린다/ 꿈많은 시절의 보랏빛이/ 잔잔한 꽃물살 되어 흐른다// 며칠째 서리가 내리고/ 시나브로 지는 목숨을// 땅 주인은 따로 있겠지만/ 오늘은 내가 이 꽃의 임자다/ 아무도 손대지 말라/ 그냥 바람에 출렁거리게 하라.’(전상렬의 ‘들국화’)

굵고 유장(悠長)한 낭만이 흘러넘친다. 땅 주인이 아니면 어때, 들국을 보고도 보지 못하는 주인보다 ‘임자’의 비밀스러운 득의만면과 희열이 더 내밀하고 농밀해서 유일무이한데…. 하지만 이렇게 은밀하고 배타적이며 강건한 독점욕조차 무위(無爲)의 자연, 들국의 출렁거림 앞에는 한낱 찰나의 바람에도 미치지 못한다. 무상(無常)한 자연과 생의 시간, 그리고 타자에 투사하는 시인의 시심에 절로 전염된다. 절제미 속의 고아한 격조, 심연과 같은 허무 속 긍정의 에너지를 얻는다.

‘동으로 트인 현관에서 하루를 향해 구두끈을 매노라면/ 푸성귀 같은 아침이 구두끝에 와 머문다/ 잊어버린 시간을 생각해 본다, 가을’ (박양균의 ‘계절’). 전상렬 시비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박양균 시비 역시 발걸음을 붙든다. 시인이자 언론인으로 영남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할 당시, 기자 초년병이었던 인연으로 묶여 감회가 남다르다. 박종철·이한열 사건 등으로 시국이 어수선하던 즈음, 시국과는 거리를 둔 시인의 글은 한때 시빗거리이기도 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면 이념이 편을 나누고 선악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됐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편협은 아직까지 현실의 도처에 남아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는 요원하고 의식의 민주화와 자유는 꿈 속에 있다. 시심은 시심이고 시국은 시국인 것을, 그때나 지금이나 모르긴 매한가지다.

시인과 시비를 생각해본다. 이춘호 기자는 시비(詩碑)를 시비(是非)하다 뭇 시인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했다. 우후죽순처럼 시비가 넘쳐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시비를 걸고, 특히 살아 있는 시인들이 무슨 유행처럼 시비를 소유(?)하는 세태를 그는 꼬집었다. 설왕설래가 무성하겠지만 아무래도 생존 시인의 시비는 좀 쑥스럽지 않나. 시비는 아무래도 떡하니 드러내는 것보다 오솔길 같은 곳에 있는 듯 없는 듯 이렇게 살짝이 숨어 있어야 시적 비의(秘意)를 전해주지 않을까. 시를 읽는 독자보다 시인이 더 많은 풍요의 시대, 번지수 모르고 괜히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정이나 맞지 않을까 모를 일. 그래도 시비는 ‘바르게 살자’ 같은 표지석일 수는 없다.

비 오는 지난 월요일 아침, 범어공원과 동대구로 사이를 오가며 시심과 시국의 경계가 천장 만장이었음을 실감한다. 지독했던 폭염과 열대야를 보내는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서서 세사에 시달리더라도 자연의 출렁거림을 잊지 않게 해 달라고 비에 의탁한다. 시간의 한 점선, 어느 여름날이 ‘잃어버린’ 시간이 되지 않기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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