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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사람책이 있는 풍경

2018-10-25

올해 가장 인상적인 사람책
환갑에 한글공부한 할머니
직접하는 이야기는 긴 여운
세상 모든사람이 한권의 책
살맛나는 세상 만드는 묘약

[여성칼럼] 사람책이 있는 풍경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서른을 갓 넘겼을 때다. 친구 서넛이 모여 수다를 떨다가 한 친구가 “난 남자가 박경리의 ‘토지’ 한질을 ‘턱’ 내놓으면서 나랑 결혼하자고 하면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대한민국에는 그걸 아는 남자가 없네”라고 말해서 한참이나 웃은 적이 있다. 방송작가였던 그 친구에게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프로포즈용 반지를 대신하는 셈인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겼지만 결혼을 했다면 희망대로 박경리의 토지를 받았는지 궁금하다.

디즈니 영화 ‘미녀와 야수’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를 대신해 성으로 잡혀온 주인공 벨이 야수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이다. 야수가 바닥에서 천장까지 빼곡히 책이 꽂혀있는 자신의 서재를 보여줬을 때인데, 단연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꽃도 아니요, 보석도 아니요, 그녀의 마음을 연 열쇠는 바로 책이었다. 벨은 야수의 서재를 보고 탄성을 지른다. 엄청난 양의 책으로 가득한 서재는 마을에서 겨우 몇 권의 책을 빌려서 읽어야만 했던 벨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더구나 야수는 자신은 거기 있는 책을 다 읽었다며 서재가 마음에 들면 마음껏 쓰라고까지 한다. 꽁꽁 닫힌 벨의 마음에 야수가 들어오는 순간이다. 이 장면이 가능한 것은 벨의 캐릭터가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벨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 중에 하나가 책이 있는 풍경이다. 어릴 적부터 천장까지 높은 서가(書架)에 주제별로 책이 가득 꽂혀있는 서재를 보면 그저 좋았다. 그래서 한때 꿈이 서점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큰 서점이 아니라 동네 어귀 모퉁이에 조그만 서점을 내고 북카페처럼 동네사랑방으로 운영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에 이 꿈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두 손 들어 말렸다. 지금처럼 동네 책방이나 골목서점이 생기기 한참 전이니 그럴 만도 하다.

현실의 벽을 깨닫고 꿈을 접은 지 한참이 흘러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가 되면서 그 꿈을 이루었다. 재단에 작은 도서관을 연 것이다. 꿈꾸던 모퉁이 책방은 아니지만 여성학, 아동 및 교양문화 도서 3천여 권을 구비하고 시민에게 오픈하고 있다. 작지만 아늑한 그 공간에서는 매달 ‘사람도서관’도 열린다. 올해에는 7명의 ‘사람책’이 독자들을 만났다. 사람도서관은 2000년 덴마크의 로니 에버겔이 처음 시작한 것으로 사람이 책이 되어 자신의 생생한 경험, 지식, 생각 등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고 소통하는 색다른 책읽기 체험이다. 조금씩 입소문이 나면서 매달 둘째 주 화요일이면 많은 시민들이 사람도서관을 찾고 있다. 재단에서는 사람책을 발굴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구시가 주최하는 대구시민대학, 여성업 엑스포 그리고 각급 학교 등에 대여도 하고 있다.

올해 만난 사람책 중에서 ‘할매의 한글도전기’를 들려준 77세 임점순 사람책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어릴 때는 너무 가난해서, 결혼 후에는 일찍 간 남편 대신 자식 키우고 생계를 잇느라 까막눈 신세를 면치 못했다고 한다. 환갑이 되던 해 새로 태어나는 심정으로 한글공부를 시작했다. 그저 열심히 하면 되겠지 했는데 한글공부가 마음처럼 잘 안되더란다. 녹록지 않은 삶을 전하면서도 활달한 성정이 담겨있는 유쾌한 사투리에 독자들은 같이 울고 웃고 교감했다. 그런데 더 큰 울림은 정작 사람도서관이 끝난 후였다. 강연수당지에 적힌 그분의 서명을 봤을 때였다. 서툰 글씨로 ‘임 점 순’ 세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책이 있는 풍경도 좋지만 사람책이 있는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사람책이 직접 전달하는 이야기는 항상 여운이 길게 남는다. 사람도서관을 나설 때면 저렇게 정성을 다해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으니 오늘도 열심히 살아보자는 다짐이 절로 든다. 매일은 아니지만 사람책 덕분에 가끔씩 살맛나는 세상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한 권의 책이다. 누구나 사람책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내년도 사람책들이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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