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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시론] 禮(예), 格(격), 敬(경)

2018-12-05
[영남시론] 禮(예), 格(격), 敬(경)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조선일보 사주의 손녀가 아버지뻘 되는 운전기사에게 내뱉은 말은 단지 한 집안의 가정교육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가 돈이라는 물신이 지배하는 천하무도의 사회임을 입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당사자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그 어린 소녀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또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재력과 권력까지 물려받게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것은 막연한 예측이 아니라 한진그룹 일가의 살기 띤 음성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10여 년 전쯤 숭례문이 불탈 때 이 나라의 ‘예(禮)’마저 송두리째 불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탓일까. 순자는 예란 분배를 통해 온 천지의 생명을 차별 없이 기르는 것이라 정의했다.(순자, 예론) 이를 꼬투리 잡아 순자를 좌파로 분류하는 무식한 인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배는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사회 때부터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요, 인(仁)의 실천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공자 역시 균(均)을 강조했던 것이다.(논어, 계시) 유가의 대척점에서 무위의 정치를 주장하던 도가도 사회의 약자에 대한 군주의 유위, 즉 군주의 책임만큼은 분명하게 명시해 두고 있다.(도덕경 78장) 그런데 고대국가도 봉건 왕조사회도 아닌, 헌법으로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 국회에서 어처구니없는 망발이 튀어나왔다. 자유한국당 송언석 의원이 한부모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돌봄 예산 69억원을 전액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대신 자신의 지역구에는 800억원이 넘는 예산을 챙겼다. “얼라 볼때기에 묻은 밥풀때기 뜯어 먹는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될 터이다.

송언석 의원은 고시로 입신출세한 고위관료 출신의 국회의원이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형적인 과거급제형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정약용은 ‘격(格)’이란 위아래를 고루 감화·감통시킬 수 있는 몸·마음가짐이라 했는데(여유당전서), 이는 수치를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요 심성이다. 그러므로 인격이란 지식이나 지위는 물론 재물의 힘으로 길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경(居敬)의 자세와 성찰(省察) 없이 궁리(窮理)에만 천착하다 출세한 과거급제형 인간의 정점에는 법관들이 있다. 사법농단 사태를 지켜보면서 참담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까닭은 대부분의 판사들이 상급자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은커녕‘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합리적 의심조차 가지지 않고 굴종했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독립이 필요한 것은 권력의 횡포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함이지 법관들의 밥그릇을 지켜주거나 법관들의 범죄에 면죄부를 주기 위함이 아니다. 국민들이 부여해 준 독립적인 지위를 악용하며 성역 속에 안주해 온 이 나라 법관들은 마침내 국민들에게 사법부를 사법부라 쓰고 사법부(私法腐)로 읽도록 만들었다. 그런데도 수치를 수치로 알지 못하고 ‘사법부 독립’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다. 주권자인 국민에게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집단이란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게다. 거경의 자세와 자기성찰 없이 궁리만을 추구해서 얻은 지식과 지위는 자칫하면 도적떼가 휘두르는 칼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 사실은 얼마 전 제주의대 교수가 온 몸으로 시연한 바 있다.

조선일보 사주 손녀의 앙칼진 목소리에서 우리 사회는 진정한 근대 시민사회로는 아직 첫 발도 내디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다. 이 나라는 재물이 부족한 나라가 아니다. 지식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 뒤처진 나라도 아니다. 단지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있다면 예의와 염치다. 그 결과 인격이 무참히 짓밟히고 국격은 한없이 초라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퇴계의 거경(居敬), 지경(持敬)의 정신으로 건강한 시민사회의 기틀을 바로 세워야 한다. 마침 무술년이 저문 뒤 그 이듬해가 바로 기미독립선언이 있은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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