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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운동 100주년 미완의 현창을 완성의 현창으로

2019-01-03 00:00
20190103

 1943년 4월25일 대구시 중구 계산로 84번지에서 한 시인이 죽었다. 42살의 젊은 나이에 불꽃같이 살다가 일본경찰의 고문 후유증, 그로 얻은 병마 앞에 쓰러졌다. 그날 밤 서울에서는 한국 사실주의 소설의 총아였고, '일장기 말소사건'에 관여되어 신문사를 사직하고 말년을 불우하게 보내던 대구 출신인 빙허 현진건도 숨을 거두었다. 빙허는 그의 아호처럼 '허공에 뜬 공허함'으로 삶을 마감했다. 둘은 막역한 친구였고, 시 또는 필로서 가혹한 일제에 맞서 거세게 항거한 동지였다.
 

상화가계는 가세가 기울어져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 마지막에 살았던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 집은 대구 시민들의 불같은 서명운동으로 복원된 상태이다. 그러나 잊혀진 곳이 있다. 그가 태어나 자란 서문로 2가 11번지 생가터는 아직도 복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48년 김소운은 죽순구락부의 지원으로 전국 최초로 달성공원에 상화시비를 세웠고, 그것이 당시에는 상화의 유일한 흔적이었으나, 지금은 고택도 복원되었고, 두류공원에는 시비동산이 생겼다. 수성 못의 상화동산에도 시비가 세워져 그나마도 고인에 대한 체면유지를 한 셈이다.
 

상화는 3·1운동 당시 시인 백기만과 같이 대구고보 · 계성고등의 학생들을 설득하여 3월 7일 학생봉기를 주도한 혐의로 서울로 피신했다. 일제의 무단통치와 민족 문화 말살정책으로 국민 모두가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통하여 독립에 대한 여명의 불씨를 살려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게 했다.
 

이것이 조국해방으로 이어져 온 국민이 환희에 찬 광복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산 같았던 민족시인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어린 3형제를 남겨두고 지금의 고택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
 

상화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서문로 2가 11번지가 도심재건축 사업에 포함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말년에 그가 담교장이라 이름 짓고, 수많은 독립지사와 문인들이 모여 담론하고, 울분을 토하며 밤을 새운 생가터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또 한 번 형언할 수 없는 허탈감에 잠길 것이다.
 

대구 도심은 곳곳에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관심이 소홀한 사이 의미있는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대표적인 것이 현진건의 유일한 흔적인 신혼집터이다. 이 집터는 헐려 주차장이 되었다.
 

'근대로의 여행' 정점에 있는 상화고택은 연간 12만명의 관광객이 몰려오는 대구문화와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고택 복원운동이 없었다면 이 또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뜨겁게 조국을 사랑했던 한 시인의 시의 자양분이며 정신의 원천인 이 생가터를 복원하는 것이야 말로 미완의 현창사업을 완성의 현창사업으로 다가가게 하는 길일 것이다.
 

독일에서의 괴테하우스나 영국에서의 세익스피어 생가가 그 나라 최고의 관광지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구의 정신인 상화 생가터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우리들의 책무가 아닐까한다.
 

아울러 빙허, 육사의 흔적을 찾아 받드는 것도 해방도 보지 못하고 몸으로 저항하고 글로서 독립의 희망을 심어준 우국시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최규목 (이상화기념사업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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