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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칼럼] 공자와 분서갱유

2019-04-24

인의예지 지향하며 살라고
공자 추종자들이 권했다면
진시황이 왜 처형했겠는가
당시엔 분명했던 그 이유를
우리는 무지해 못봤을 수도…

[수요칼럼] 공자와 분서갱유
김기창 고려대 법학전문 대학원 교수

공자와 유가사상에 대해서 개혁이나 혁명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체제 순응적이고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예기(禮記)에는 “예법은 아래로 서민에까지 미치지 않고, 형벌은 위로 대부에까지 미치지 않는다”라는 생뚱맞은 구절이 난데 없는 곳에 등장한다. 이런 구절은 아랫것들은 형벌로 엄히 다스려야 하지만, 윗 분들은 예법을 스스로 지키는 고상한 분들이므로 점잖게 교화해야 하는 것이고 형벌을 적용할 수 없다는 따위의 후안무치한 계급 차별 의식, 특권 의식과 쉽게 결합하기도 한다. 게다가 맹자에 나오는 “남편 말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부녀의 도리”라는 구절은 또 어떤가? 세상의 절반을 고통으로 몰아넣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태어날 때부터 누구는 순종해야 하고, 누구는 군림하고 지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이런 구절들은 유가 사상을 외면하고 멀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논어의 몇몇 핵심 구절에 대한 교묘한 오역(誤譯), 천년도 넘게 지속되어 왔던 잘못된 해석 전통 등을 교정하고, 공자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했던 묵자(墨子) 등에 기록된 내용을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볼 경우, 그동안 가려져 왔던 공자의 진면목이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며 공자와 서로 안면이 있던 제(齊)나라의 유명한 재상 안영은 공자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공구(孔丘)라고 불리는 자가 바로 공자이다. ‘공 선생님’이라는 존칭(孔子)을 싸그리 걷어 젖히고 이름을 그대로 불러대며 신랄하게 ‘까는’ 상황이다.

“공구는 철저히 계획하고 모의해서 반란 세력을 지원하고, 열심히 생각하고 아는 것도 많은데 그것으로 사악한 행위를 감행하며, 아랫 사람들을 부추겨서 윗사람을 끌어내리도록 하고, 신하들에게 주군을 살해하도록 가르칩니다. 이것은 현명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후국을 방문해서는 반란 세력과 함께하는데 이것은 올바른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충성심이 없어졌음을 알고는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는데, 이것은 좋지도 않고 옳지도 않습니다. 도망간 후에도 모의를 하고, 등 뒤에서는 나쁜 말을 퍼뜨립니다. 자신은 옳은 일을 한다고 믿겠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는 혼란스럽고, 그 사람이 기획하고 감행하려 준비하는 것에 군주나 신하들이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공자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묵자가 소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에도 제나라의 재상 안영이 공자와 그 추종자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묵자가 없는 말을 만들어 내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만일, 공자와 그를 추종한 세력들이 그저 온량공겸(溫良恭謙·따뜻함, 선량함, 공손함, 겸손함)이나 강조하고, 예의를 지키고(禮), 부모님 잘 모시고(孝), 형제 간에 우애있게 지내고(弟), 시간날 때마다 책읽고(學而時習之), 정치인은 미덕을 발휘하고(德治), 모두들 어질게(仁), 꾹 참으며(忍)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지향하며 살아가라고 권하던 사람들이었다면 어째서 진시황이 공자의 추종자 467명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의학, 약학, 점복, 종자와 수목에 관한 책을 제외한 유가 사상을 담은 서적을 불태워 없애도록 조치했을까? 공자의 추종자들이 윗사람 말 잘 듣고 고분고분 온순하게 살라는 내용을 전파하던 사람들이었다면, 오히려 진시황 같은 통치자가 적극 환영했지 않았을까?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그저 폭군이 자행한 이유 없는 처사였을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무지하여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했던 ‘이유’를 못 보기 때문이 아닐까?김기창 고려대 법학전문 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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