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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이탈리아 돌로미티 패스

2019-07-26

기묘한 석회암 봉우리 아래 펼쳐진 ‘천상의 트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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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알페디시우시 고원에서 보이는 돌로미티 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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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미티 패스의 작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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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페디시우시에서 내려다 본 오르티세이 마을.

“최소한 5일, 2주 이상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을 여행지”(곽노은)란다. 또 “악마의 왕국처럼 황량하고 거칠지만, 그 안에는 천국의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다”(진우석)고도 했다.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 패스 지역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를 생략하기로 했다. 여행자에게 시간은 황금과 같다. 모두 갈 수가 없으니 선택을 해야 한다. 아말피 해안의 그림 같은 절경을 반환점으로 다시 북상을 한 것은 순전히 돌로미티 패스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2009년에 이 지역 전체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곳이다. 돌로미티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접경하고 있는 이탈리아 북부의 알프스 산맥지대이다. 돌로미티 패스는 이 산맥을 넘나드는 산악도로이다. 마을을 기점으로 이야기하자면 볼차노(Bolzano)에서 코르티나담페초(Cortina d’Ampezzo) 사이에 난 길이다.

돌로미티의 풍경은 독특하다. 백운석회암의 침식작용에다 산사태, 눈사태, 홍수 같은 동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된 봉우리들이 기기묘묘한 형상을 띤다. 이처럼 다양한 석회암 지형이 한 곳에 모인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단다. 그러니 드라이빙이나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2박3일의 일정밖에 할애할 수 없었던 나의 선택은 이틀간 트레킹을 하고 사이사이에 산악도로를 드라이빙하는 것이었다.


알프스 산맥 넘나드는 산악도로 돌로미티 패스
다양한 백운석회암 지형 한곳 모여 독특한 풍경
해발 2천m 트레킹 루트, 유럽에서 가장 넓은 고원
케이블카 타고 오르면 축구장 8천개 크기 평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에 마법처럼 이끌려

두번째 트레킹 코스 세 개의 봉우리 ‘트레치메’
1956년 동계 올림픽 천연 빙상장 미주리나 호수
거친바위, 황량한 고원위 우뚝서 처연하면서 장엄



드라이빙 동선을 따라 첫 목적지를 알페디시우시(Alpe di Siusi) 트레킹으로 잡았다. 돌로미티에는 수많은 트레킹 루트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높은 길’이란 뜻의 알타비아(Alta Via) 루트이다. 짧게는 90㎞에서 길게는 200㎞ 가까운 코스가 10개나 있다. 며칠씩 걸리는 이런 코스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하루 코스로 대표적인 두 곳, 알페디시우시와 트레치메디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를 골랐다.

알페디시우시는 해발 2천m에 위치한 유럽에서 가장 넓은 고원 지대이다. 52㎢에 달하는 평원은 축구장 8천개 정도의 크기라 하니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이곳은 보통 오르티세이(Ortisei) 마을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오르티세이는 해발 1천236m 언덕 위에 있다. 인구는 6천명도 안 되지만 매년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80만명이 훨씬 넘는다. 1970년에는 이곳에서 알파인 스키 세계 선수권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 마을을 기점으로 돌로미티의 여러 산군들이 케이블카로 연결되어 있으며, 알페디시우시로 가는 케이블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편도만 사서 걸어 내려올까도 생각했지만 트레킹 시간을 예단할 수 없어서 왕복 티케팅을 했다. 케이블카가 고도를 높이면서 오르티세이 마을은 점점 작아져 갔다. 그리고 잠시 뒤 고원 위에 발을 내딛자 벅찬 광경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에 눈길이 부딪는 곳마다 우뚝한 바위 봉우리들은 상상하지 못했던 풍광이었다. 바다가 융기되어 형성된 이 고원 주위로 3천181m의 사소룽고를 비롯하여 사소피아토, 세체다, 쉴라슐레른 등 2천750m 이상의 봉우리가 35개나 널려 있다.

가을 초입에 들어선 이곳은 여름내 이곳을 수놓았던 들꽃의 흔적 위에 여전히 노란 민들레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눈이 시린 푸른 하늘에는 내키는 대로 흰 물감을 찍어놓은 듯한 구름이 걸려 있고, 그 아래 햇살은 초원을 어루만지며 반짝이고 있었다. 햇살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구름의 방향만으로도 풍경이 달라졌다. 내가 알고 있던 인간 세상과는 달랐다. 분명 ‘악마의 왕국’ 속에 숨겨놓은 ‘천국’인 것 같았다. 순간 이럴 줄 알았으면 자동차를 며칠 묵혀두더라도 종주 트레킹을 했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길을 따라 목적 없이 걸었다. 아니, 걸었다는 능동사는 맞지 않는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에 이끌려 다녔다. 우뚝한 사소룽고 봉우리가 계속 나를 잡아끌었지만 케이블카 마지막 탑승시간이 신경 쓰였다. 금방 잡힐 것 같던 봉우리는 다가갈수록 뒷걸음쳤고, 햇살이 옅어지는 걸 느끼면서 결국 뒤돌아섰다. 사람들이 이곳을 ‘천상의 트레일’로 부르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천상’에서 내려와 이제 드라이빙을 나섰다. 돌로미티에는 최고의 절경이라는 파소 지아우(Passo Giau)를 비롯하여 수많은 드라이빙 코스가 있다. 그러나 돌로미티 산군에 들어서니 도로 이름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넋을 놓게 만드는 풍경이 펼쳐졌다. 저녁에 묵을 캠핑장을 목적지로 설정해 놓고 내키는 대로 다녔다. 이곳은 스위스 알프스 3대 패스 드라이빙과는 또 다른 흥분을 안겨주었다. 스위스 패스가 산 속을 달리며 알프스와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면 이 길은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괴한 바위 봉우리를 머리에 이거나 허리춤에 끼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온전히 그 위엄 속으로 빨려들었다. 방향만 바뀌면 달라지는 이상한 풍경 때문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마치 경배하듯이 자주 차를 세워 눈을 맞추었다. 유럽의 여러 산악도로를 넘어왔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경이로운 산길이었다. ‘천국’에서 내려와 이제 ‘악마’가 만든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무섭거나 외로울 만하면 작은 교회나 겸손한 통나무집이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이런 살아 있는 것들이 이곳을 지나가게 하는 힘 같았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돌로미티의 중심 마을인 코르티나담페초에 이르렀다. 이 마을의 인구는 6천여명에 불과하지만 스키 시즌에는 5만여명의 관광객이 몰려온다. 돌로미티를 배경으로 한 이곳의 스키 리조트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나 있다. 1956년에는 제7회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다. 이 마을은 007 시리즈 ‘유어 아이스 온리’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로저 무어가 스키를 타고 오토바이를 탄 적들과 눈길을 질주하는 장면이 바로 이 마을 부근이라고 한다.

어둠이 몰려들며 마음이 급해졌다. 마을 구경을 포기한 채 인근 캠핑장에 들었다. 옥빛 개울을 끼고 있는 캠핑장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초저녁부터 을씨년스러운 겨울 냉기를 뿜고 있었다. 아껴둔 말린 김치로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래도 추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텐트 바닥에 전기장판을 깔고 오리털 파카까지 걸치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나 냉기 때문에 새벽녘에 눈이 떠졌다. 9월의 돌로미티는 생각보다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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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치메의 카스텔리 교회.

9월 중순인데 트레치메에는 벌써 눈이 왔단다. ‘돌로미티의 심장’이라는 이곳이 나의 두 번째 트레킹 지역이다. 목도리에 털모자까지 갖추고 차에 올랐다. 트레치메 입구로 향하는 길에 미주리나 호수를 들렀다. 1천756m 높이에 위치해 있는 미주리나 호수 뒤로는 거대한 트레치메 봉우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이 2.6㎞, 깊이 5m의 이 호수는 1956년 동계올림픽 당시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가 열린 천연의 야외 빙상장이다.

이 호수에는 또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미주리나는 소라피스 왕의 공주였다. 크리스털로 요정의 마법 거울을 갖고 싶었던 공주는 아버지를 졸랐다. 요정은 왕이 산이 되어 자기 정원에 쏟아지는 햇빛을 가려주면 거울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공주가 거울을 쥐자 왕은 거대한 소라피스 산으로 변했고 공주는 그 산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이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왕은 끝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이 모여 미주리나 호수가 되었단다.

새벽안개가 어스름한 호수는 거울같이 맑았다. 소라피스의 눈물이 만든 이 호수는 공주가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마법 거울처럼 멀리 모이는 바위산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주었다. 요정의 정원인 양 호수 주위 초원의 들꽃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였다.

호수에서 트레치메까지는 멀지 않았다. 세 개의 봉우리를 뜻하는 트레치메는 가장 작은 봉우리 치마 피콜로(2천856m), 가장 큰 봉우리 치마 그란데(3천3m), 동쪽 봉우리 치마 오베스트(2천972m)로 이루어져 있다. 트레치메 매표소 입구를 지나자 길가에 흰 눈들이 수북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차량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채비를 단단히 했는데도 냉기가 얼굴을 때렸다. 트레킹은 해발 2천300m의 아우론조 산장에서 시작했다. 서쪽에서부터 돌기 시작하는 이 코스는 완만하여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코스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햇살이 오르면서 눈이 녹아 더욱 미끄러웠다. 풀포기 하나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순례자처럼 트레일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슨 의식처럼 성스러워보였다.

북사면으로 들어서니 한 덩어리 같았던 트레치메가 각각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연한 세 봉우리는 칠레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의 세 봉우리를 생각나게 했다. 호수를 품고 있는 토레스의 봉우리들이 수려하다면 거친 바위와 황량한 고원 위에 우뚝 선 트레치메는 처연하면서도 장엄하였다. 실제 이곳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벌어진 비극적인 산악전쟁의 현장이다. 중간에 만난 작은 로카텔리 교회는 바로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트레치메의 뿌리 밑에 서니 그 위용이 말문을 막는다. 이곳이 ‘악마의 왕국’이라면 트레치메는 ‘악마’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왕국’의 상징 같았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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