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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加也勿減也勿

2019-09-12
[문화산책] 加也勿減也勿
김수상 <시인>

“밤하늘 하도 푸르러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쳐대 빨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 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또 가고/ 싶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 번 들었던가”(이성복 ‘추석’ 전문)

명절을 앞두고 세상 돌아가는 일이 많이 시끄럽습니다. 태풍도 다녀갔습니다. 세찬 비바람이 혼탁한 세상을 깨끗하게 했으면 좋았겠지만, 오히려 생채기만 남기고 갑니다. 이렇듯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의 일입니다. 오히려 세상이 우리를 굴려갑니다. 세상의 일과 우리가 무관하지 않으니 세간의 일에 마음을 쓰는 것도 맞습니다. 추석 정국, 추석 민심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추석엔 정치 이야기가 뜨겁습니다. 모처럼 모인 가족과 친척들이 정치 얘기 때문에 다투기도 하고 마음까지 상하고 맙니다. 그런 명절이 싫어서 일찌감치 항공권을 예약하고 해외에서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100만명을 넘었습니다.

‘가야물감야물(加也勿減也勿)’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팔월 한가위의 풍요로움을 일컫는 말입니다.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처럼 8월은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고 신선처럼 지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날이겠습니까. 오곡이 익은 가을날,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살았으면 하는 조상들의 기원이 깃든 말이 ‘가야물감야물’입니다. 여야가 싸우든 말든, 장관이 누가 되었든, 추석날만큼은 오히려 세상일에서 벗어나서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흰 옥양목 치대 빨 듯, 누런 삼베 헹구어 빨 듯, 말끔히 씻어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는 명절 연휴에 해외여행을 간다는데, 고향에조차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강남역 네거리 철탑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씨가 그렇고,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박문진, 송영숙 영남대의료원 해고자들이 그렇습니다. 밥그릇을 빼앗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지금의 이 평화는 울면서 잠 못 드는 그들에게서 조금씩 빼앗아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릴케는 “가난한 사람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는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큰 소리를 내며 걸어간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먹을 것이 차고 넘치는 세상인데도, 가난 때문에 온 가족이 죽음을 택한 아픈 사연들을 만납니다. 이미 세상을 등졌으니 고인께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그분들에겐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 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시인의 시를 다시 읽습니다.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 번 들었던가요. 추석은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기도 하지요. 아, 추석날 푸른 밤에 아무도 모르게 헤엄쳐 다녀왔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곳까지.

김수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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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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