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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타임] 가장 무거운 형벌

2019-12-16
20191216
노진실 문화부 기자

“아렌트는 자기 평생의 연구에서 아이히만의 재판이 끼친 영향을 공공연히 인정했고 사유와 의지, 판단이라는 행위들로 구성된 철학사를 연구하는 데 헌신했다. 그리고 이런 탐구의 절박한 동기를 제공한 근원이 바로 아이히만의 무사유라는 ‘사실’을 목도하고 그 ‘사실’이 바로 독일의 도덕적 붕괴에 중대한 일익을 담당했다는 깨달음에 있다고 여러 번 밝혔다.”

최근 읽은 ‘터프 이너프’라는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한나 아렌트가 당시 대중의 비평과 억측 속에서도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써내고, 관련 연구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동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가장 편한 삶이겠지만, 살다 보면 자신의 인생을 걸고서라도 세상에 무언가를 고발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기자가 KBS에 대해 쓰게 된 ‘절박한 동기’는 일련의 독도 헬기사고 동영상 논란과 그에 대한 KBS의 대응을 목도한 것이다. ‘무적 파워’ 공영방송을 비판했다간 어떤 식으로든 해코지나 앙갚음 당할 수 있다는 주위의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손익계산을 따질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비판 기사도 쓰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전화도 했다.

일년 전에 집 TV를 없애 버렸지만, 수신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한달 전쯤, 처음으로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수신료를 안 낼 수 없는지 물었다. 차라리 2천500원을 태워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관리사무소에서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남은 건 청와대의 국민청원 답변뿐이었다. 얼마 전 20만명 이상의 국민이 수신료를 전기세와 분리 징수해달라고 청원을 한 것이다. 기대는 안 했지만, 청와대의 답변은 역시나였다. 청와대의 변호를 업은 KBS의 ‘승’이었다.

공영방송에 벌을 주고 싶었던 국민의 청원은 그렇게 허무하게 종결됐다. 법이 그렇단다. 만약 다른 언론이 KBS 정도의 논란을 일으켰다면, 아마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다. 역시 신계(神界)의 언론사다. 미꾸라지가 KBS 못 이기겠다고 울겠다.

화는 나지만 기자는 이제 더 이상 KBS 관련 기사를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들을 향한 ‘가장 무거운 형벌’은 이미 시작됐기에, 내가 더 할 일이 없어 보인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고,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으로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법전에 쓰여 있지 않은 가장 무거운 형벌이 있다. 그것은 ‘정체성을 부정 당하는 것’이다. 있어도 있지 않은 것, 살아도 살지 않은 것, 인간이 인간 대접을 못받는 것, 언론이 언론 대접을 못받는 것.

이제 KBS가 이미지 쇄신한다며 무슨 짓을 해도 많은 국민 눈엔 ‘쇼(Show)’로 보이고, 마음속엔 불신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이 공영방송 지위를 활용해 다른 언론들을 비판하더라도 상당수 국민 눈엔 ‘내로남불’ ‘위선’으로 보일 것이다. 살아는 있는데 정체성을 상실한 존재를 바로 ‘좀비’라고 한다. 그만큼 무섭고 무거운 형벌이 또 있을까.

노진실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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