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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6·25전쟁 70주년 영남일보 특별기획 1부-경북의 戰線 .1] 상주 화령지구전투

2020-01-06

참전용사 한도수옹이 전하는 그날
"한 시간여 '매복 기습'…적들은 숟가락 든 채 반합에 얼굴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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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화령지구전투는 6·25전쟁 초기 가장 큰 전과를 얻은 전투다. 대구방향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을 지연시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매우 중요한 전투로 전사에 기록돼 있다. 〈화령전승기념관 제공〉

▶시리즈를 시작하며

올해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세월만큼이나 전쟁세대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고, 민족상잔의 아픔과 비극도 역사책에서나 확인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에 놓여 있고 화해, 협력, 평화의 기운은 나타났다가도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영남일보는 6·25전쟁 70주년을 앞두고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한 당시 경북의 전투를 비롯해 전쟁 속에서 꽃핀 대구지역 문화, 국가 유공자 보훈 실태 등을 짚어보는 특별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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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지구전투 등 각종 전투에서 살아남은 17연대 6중대원들. 〈1952년 촬영, 화령전승기념관 제공〉

상주 화서면 상곡·하송·동관리 일원에서 벌어진 화령지구전투는 6·25전쟁 발발 초기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전투다. 대구방향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을 지연시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매우 중요한 전투로 전사에 기록돼 있다. 주민들은 인민군의 동태를 적극적으로 우리 군에 알려주고 정찰활동과 매복작전에도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국군은 이를 적극 활용해 훌륭한 작전을 펼쳐 당시 상상하기 어려운 전과를 올렸다.

지난해 12월24일 화령지구전투 참전 용사인 한도수·홍순용·장용기옹이 독립 제17연대 전우회 배동선 회장, 류승관 사무처장과 함께 화서면 전투현장을 찾았다. 17연대는 화령지구전투 주력부대다. 17연대 1대대 2중대 소속이었던 한도수옹은 구순을 1년 앞둔 고령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전해 줬다. 그를 따라 70년 전 화령지구전투 현장으로 돌아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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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국민학교 터에 자리한 화령지구전승기념관에서 바라본 봉황산. 정면으로 보이는 산자락이 17연대 1대대 병력이 매복했던 봉황산 북동사면이다. 전차 뒤의 포장 도로가 49번 도로이며 논과 제방길 건너 냇물이 이안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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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용사 홍순용·한도수·장용기옹(왼쪽부터)이 이안천변에서 자신들이 매복했던 위치를 찾고 있다.

고깔모자처럼 삐쭉이 솟아 오른 구병산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조금 달리니 화령이 나왔다. 부대원들은 전투에서 연이은 패배와 그에 따른 잦은 이동으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부대는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화령을 거쳐 함창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천만다행으로 트럭이 배정돼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투성이가 돼 걷지 않아도 됐다. 화령으로 들어서는데 50대 노인이 트럭을 세웠다. 노인은 얼굴이 검고 큰 키에 몸집도 좋았다. 눈동자가 보통 사람과 달리 푸른 색을 띠었다.

"나는 중달리에 사는 엄봉림이라 하오. 어젯밤에 북한군이 우리 마을을 지나 괴산~상달리로 통하는 길을 따라 상주로 갔소. 지금 이 길을 그냥 가면 위험하오."

엄봉림이라는 노인은 그 사실을 신고하러 화서지소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노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괴산에서 상달리로 통하는 길은 작전지도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 노인의 말대로 화령재를 넘어가니 그 길이 있었다. 괴산에서 화북~갈령재~문장대휴게소 삼거리로 연결되는 49번 지방도다. 대대장은 선임하사에게 나(한도수옹)와 이완식을 데리고 주변을 정찰할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송계국민학교에서 문장대휴게소 삼거리 방향으로 정찰을 했다. 상곡교 아래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상주방향에서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북한군 복장에다 소련제 모신나강(Mosin-Nagant) 소총을 등에 메고 있었다. 잡아서 심문을 해보니 전날 상주로 간 북한군 부대장이 본대에 보내는 전령이었다. 이 전령을 통해 우리는 북한군 15사단 48연대의 주력부대가 이날(7월17일) 오후에 49번 지방도를 이용해 상주로 진군할 것이며 상곡교 바로 위의 송계국민학교에서 저녁을 먹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아냈다.


17연대, 북한군 송계학교 집결 알아채
봉황산에 숨었다가 저녁시간 틈타 공격
250명 사살·30명 생포…아군 피해 '0'
주민 협조로 이룬 전쟁초기 최대 전과
대구방향 남하 지연 중요 전투로 기록


대대장은 매복작전을 짰다. 송계국민학교 앞의 봉황산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북한군이 비무장 상태에 있을 때 기습 공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대대장은 학교가 코앞으로 내려다 보이는 봉황산 3~4부 능선에 병력을 배치했다. 매복 위치를 잡고 호를 파는 데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적극 도와줬다. 오후 3시쯤 진지 구축이 완료되고 매복에 들어갔다. 매복 참호 바로 아래로 이안천이 흐르고 49번 도로와 내(川) 사이에는 논과 밭이 좁게 펼쳐져 있다. 학교 운동장은 경계도 없이 도로와 연접해 있다. 학교와 참호와의 거리는 200~300m 정도.

한 시간쯤 지나자 왼쪽 방향에서 북한군 행렬이 나타났다. 갈령쪽으로부터 소총을 멘 보병 부대가 앞장서서 행군을 하고, 포와 보급품을 실은 것 같은 달구지 40여 대가 뒤따랐다. 작전 장교는 북한군이 보병 2개 대대와 포병 1개 대대로 구성된 연대급 부대라고 판단했다. 행렬은 이윽고 송계국민학교로 속속 집결했다. 북한군은 더위와 긴 행군에 지친 듯 총을 세워 놓고 바로 흩어졌다. 일부는 옷을 벗어 던지고 개울로 뛰어들었고, 또 일부는 모든 게 귀찮다는 듯 그늘을 찾아 누웠다.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경계병을 한 명도 세워 놓지 않고 무장해제 상태에 들어갔다.

북한군 병사들은 참호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개울에 뛰어들어 첨벙거리며 시시덕거렸다.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자니 긴장이 풀리고 고향 생각까지 났다. 충남 청양군 대치면 칠갑산 자락의 고향 마을은 이곳처럼 사방을 둘러봐도 산뿐이고 고개를 들면 하늘만 보인다. 아무리 더운 오뉴월에도 계곡물은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다. 옷을 벗은 저 사내들을 보고 있자니 순간 고향 친구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대장은 수시로 진지를 돌며 "사격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절대 총을 쏘지 말며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고 낮은 소리로 다짐을 받아냈다. 그냥 있는 것이 무료해 M1소총을 거총했다. 오른쪽 볼을 개머리판에 붙이고 가늠자를 통해 물놀이에 정신이 팔린 북한군을 훑었다. 조준선 정렬을 하고 나무에 기댄 채 잠든 병사의 머리를 가늠쇠에 올려 놓았다. 숨을 멈추고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방아쇠를 서서히 당기는 상상을 했다. 탕! 총알은 낮잠 자는 병사의 미간을 관통했다.

시간이 지나도 사격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더위가 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물놀이에, 낮잠에 정신이 팔린 저들은 자신의 몸이 호구(虎口)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코앞에 있는 저들은 적군이 맞는가? 대대장님의 인내심은 어디까지 일까?'

좁아 터진 호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은 지가 벌써 세 시간은 지났을 것 같다. 길어진 봉황산의 그림자는 이미 학교 운동장을 덮었다. 언제부턴가 학교 뒤 민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흩어져 있던 저들이 반합을 들고 운동장에 집합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저녁식사를 위해 집합을 한 것이다. 반합에 밥과 국을 가득 담은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떠들면서 숟갈질을 해댔다. 배식을 받기 위해 늘어선 병사들의 줄이 3분의 2쯤 줄어들었을 때였다. 총성 한 방이 울렸다. 동시에 대대장의 쇳소리 섞인 일성(一聲)이 봉황산 자락을 흔들었다.

"사겨억 개시!"

동시에 1대대의 모든 화기가 불을 뿜었다. 소총수들의 M1소총, 소대장과 선임하사의 카빈 소총, 각 소대 화기분대의 M1918기관총, 화기소대의 60㎜박격포, 화기중대의 80㎜포가 쉴새 없이 송계국민학교 운동장에 공격을 가했다. 북한군은 처음엔 영문도 모른 채 앉아서 당했다. 숟가락을 든 채 모로 쓰러지고 반합에 얼굴을 박았다. 사태를 알아차렸지만 호구에 갇힌 적 병사들은 도망갈 길이 없었다. 황급히 일어나 뛰었지만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쓰러지고, 총을 손에 넣은 병사들도 어디로 사격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당했다.

일방적인 살상이라 할 전투는 한 시간 정도 이어졌다. 공격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 멈췄다. 다음날 아침 전장정리(戰場整理) 결과 북한군 250명을 사살하고 30명을 생포했다. 박격포 20문, 45㎜ 대전차포 7문, 소총 1천200정 노획 등의 전과도 확인됐다. 아군 인명 피해는 '0'. 화령지구의 상곡리전투는 이렇게 엄청난 전과를 올리고 마무리됐다.

1대대장은 상곡리 전투의 잔당을 소탕하는 한편, 갈령쪽으로 수색대를 보냈다. 수색대는 18일 오전에 또 북한군 전령 2명을 생포해 같은 길(49번 도로)로 북한군 15사단 45연대가 이동한다는 정보를 획득했다. 제17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19일 2대대와 3대대를 봉황산에 매복시켰다. 상곡리 전투 매복지에서 갈령 방향 북쪽으로 1~2㎞ 떨어진 곳이다. 부대원들은 북쪽의 갈령을 바라보며 매복해 있다가 전투를 치렀다. 19일부터 21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아군은 북한군 356명을 사살하고 26명을 생포했다. 국군은 23명이 전사하고 50명이 부상당했다. 이 전공으로 보병 제17연대 전 장병 2천600명은 1계급씩 특진했다.

글·사진=이하수기자 songa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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