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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예술가와 동반자

202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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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는 한국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언어를 통해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정립한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다.

 


최근 김환기의 작품 '우주'가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이라는 우리나라 작품 중 최고가 에 등극하면서 국제적으로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는데 있어 큰 계기가 되었다. 국내 경매 상위 1~10위 중 9위 이중섭의 '소'를 제외하고 김환기 작품이 모두 차지했다. 김환기가 김환기의 최고가를 뛰어넘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김환기 삶과 성품을 생각하면 한국작품 경매 최고가라는 수식어는 그리 어울리지만은 않은듯 하다. 


김환기는 인품과 멋을 지녔으며, 선비 같으면서도 문학적인 품성을 가진 예술가였다고 한다. 대지주의 아들로 일찍이 일본 유학을 시작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다 포기하고 프랑스, 미국으로 건너가 오로지 자신의 작품세계의 지속적인 변모를 추구하였다. 김환기가 이렇게 세속적인 욕심에서 벗어나 화가로서 전념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이해하고, 절대적 지지를 아끼지 않은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재혼한 아내 '김향안'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김향안' 여사는 요절한 작가 이상의 아내였고, 그 후 다시 화가 김환기를 만나게 되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름까지 '변동림'에서 남편의 성과 호'향안'을 따와 '김향안'으로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김향안은 문필가였으며, 그림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또한 당시 문인들과 인연이 많아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에게는 내조의 끝판왕이라는 수식어가 달 렸다. 프랑스에 진출하고 싶어 했던 김환기를 위해 불어공부를 했고, 먼저 프랑스로 건너가 기반을 다졌으며 미술에 관련된 책과 기사를 번역해 주었고, 통역사 역할도 하였다. 이렇듯 그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줄 아는 낭만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함을 지녔다. 나는 그녀의 삶과 남긴 글을 보며 헌신적이기도 하지만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김향안은 1974년 김환기와 사별한 후에도 그의 마지막 소망인 환기미술관을 만들고, 그가 더 큰 세상에 설 수 있도록 노력했다. 어쩌면 계속 함께 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함께 있음으로 해서 두 사람의 세상은 커지고 넓어졌다. 그들은 지금도 나란히 뉴욕 근교 묘지에 함께 하고 있다.
윤종주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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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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