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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미애의 문화 담론] 장인정신과 사무라이정신

2020-03-06

문경 농가 쓰던 '막사발'…日 국보 '이도다완'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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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26호로 지정된 기자에몬 이도다완(喜左衛門井戶茶碗).
천한봉
도자기를 빚고 있는 도천 천한봉 선생.

우리나라는 신라·백제·가야 토기와 고려청자·조선백자에 이르기까지 예부터 도예(陶藝)기술의 원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조 세조 말기(1467년)에는 경기도 광주에 왕실 관요(官窯)가 설립되고 백자를 대량생산한 가마터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관요의 도공들은 천한 신분에 불과했다. 백자 도공(陶工)들은 조선 왕실의 폭정으로 녹봉(祿俸)도 받지 못한 채 백자를 굽다가 줄줄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관요가 사라지고 생계를 위한 도공들의 원천기술은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 민요(民窯)로 발전했다. 일본인들이 국기(國技)처럼 즐기는 다도(茶道)는 그 뿌리가 조선 도공들의 장인정신에서 비롯돼 사무라이정신(武士道)과 맥을 같이해 왔다고 한다. 사무라이정신이란 일본인들의 정의로운 정신 윤리와 인격 도야의 상징. 백자를 빚으며 정신일도(精神一到)로 갈고닦아온 조선 도공의 혼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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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때 문경새재 북상중 日 장수
우물가 나뒹굴던 사기그릇 발견
흘러내린 유약, 매화꽃처럼 얼룩
'숨쉬는 찻사발' 여긴 예술의 극치

조선도공·도예기술·흙까지 수탈
사무라이 정신·다도문화 꽃 피워

마지막 후예 '문경요' 천한봉 선생
400년전 고유의 井戶 막사발 재현

그래서 다도하면 사무라이정신을 말하고 사무라이정신은 곧 조선 도공의 장인정신에서 나왔다고 했다. 살아 있을 때 정의에 충만하고 죽을 때엔 치욕을 당하지 않는 셋푸쿠(切腹)는 사무라이정신의 근간이었다. 닛폰도(日本刀)로 자신의 혼이 깃든 배를 갈라 자결하는 것은 극도의 냉정과 침착을 요하는 일본인 특유의 양심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닛폰도 역시 조선 도공의 장인정신을 본받아 메이도(銘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종전 무렵 일왕 히로히토(1901∼1989)가 무조건 항복했으나 일본군 지휘관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셋푸쿠로 자결했다. 사무라이정신으로 치욕을 당하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사무라이정신은 민족주의의 핵심적 요소로 국가와 일왕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주창되었고 군국주의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정신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400여년 전 임진왜란 당시에는 문경에서 '적과의 동침'이라는 기이한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침략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문경새재를 향해 북상할 무렵 휘하 장수가 한 농가의 우물가에 나뒹굴던 사기(沙器)그릇을 발견하고 전리품으로 챙겼다. 그 당시 우리 농가에서 흔히 개 밥그릇으로 쓰던 막사발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막사발은 도공이 질그릇을 가마에 넣어 굽는 과정에서 실수로 흠집이 생기고 유약이 흘러내려 산화한 파작(破作)을 내다버린 것이었다.

이를 농가에서 주워다 개 밥그릇으로 사용했으나 다도를 사무라이정신과 직결시키는 일본 장수의 눈빛은 달랐다. 버려진 파작 막사발의 밑바닥에 흘러내린 유약이 물을 부으면 마치 매화꽃처럼 분홍색으로 얼룩지는 것을 발견하고 "숨쉬는 찻사발"이라며 예술의 극치로 봤기 때문이다. 조선 농가의 우물가에서 발견한 찻사발이라 하여 우물 정(井)자와 집 호(戶)자를 붙여 부른 이름이 이도다완(井戶茶碗).

이를 계기로 일본 침략군은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으로 부를 만큼 우리 막사발에 유달리 눈독을 들였고 처음 문경 농가에서 발견된 막사발은 마침내 황실로 전해져 국보(國寶) 제26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흔해 빠진 조선의 파작 막사발이 일본 국보 '이도다완'으로 변신한 연유다.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사무라이정신으로 무장하며 다도를 생활도(生活道)로 삼았으나 찻사발이라곤 히노키(扁柏) 나무를 깎아 만든 목기(木器)밖에 없었다. 사기그릇을 만드는 흙이 귀했던 탓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령토나 백토 등 찰진 흙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으나 지진과 해일이 잦은 척박한 일본 열도엔 검은 색깔의 박토(薄土)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들은 우리 도공들을 모조리 끌고 가 불모지 일본의 도예문화를 꽃 피울 때 고령토와 백토도 함께 실어날랐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작 조선에는 도공의 씨가 말라버렸으나 도예기술의 명맥은 끈질기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 마지막 도공의 후예가 현재 문경요를 운영하고 있는 도천(陶泉) 천한봉(千漢鳳·87) 선생.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인 그는 대한민국 도예명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여 경북도가 그를 비롯한 도내 중요무형문화재의 역사적 기록을 후세에 전하고자 구술채록(口述採錄) 연구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도예 역사를 재조명하는 이 구술채록 연구에 필자가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하면서 천한봉 선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 볼 기회가 생겼다.

구한말 의병장의 후손인 그는 기구하게도 일본에서 태어나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경험했고 광복 후 귀국해서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사기그릇공장에 취업, 기능공의 위치에 오른 17세 때엔 6·25전쟁의 포화 속에 휩쓸렸다. 난리통에 도자기를 굽다가 두 번이나 군대에 다녀오기도 했다. 처음엔 보국대(報國隊)에 끌려가 최일선에서 지게를 지고 보급품을 나르던 중 군번 없는 병사로 현지 입대해 강원도 횡성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평양 포로수용소까지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해 마침내 귀향하여 도공의 자리로 돌아왔으나 뜻밖에도 입영영장이 날아와 또다시 논산훈련소로 입대하게 된다. 애초부터 우여곡절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하지만 행운도 따랐다. 1960년대 후반 문경요를 설립하고 막사발을 만들던 중 뜻밖에도 일본 교토의 다이가쿠지(大覺寺) 주지 사쿠라 가와 스님이 찾아와 찻사발을 주문한다. 그는 사쿠라 가와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 문경의 어느 농가에 굴러다니던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일본 도예계의 실상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지체없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1년여 일본에 머물며 이미 400여 년에 걸쳐 일본화(化)해버린 우리 도예문화의 실상을 접하고 돌아와 임진왜란 당시 문경 농가에 나뒹굴던 고유의 정호(井戶)막사발을 재현하기 위해 흙과 물과 불의 조화에 천착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가 재현한 찻사발은 일본의 국보와 별반 차이가 없어 차인(茶人)들을 열광시키고 마침내 다도를 즐기는 황실에까지 '한국의 신비로운 찻사발'로 알려지게 된다. 일본인은 사무라이정신으로 조선을 침략했지만 조선의 도공은 장인정신으로 일본을 굴복시킨 것이다.

그는 2008년 아키히토(재위 1889∼2019) 일왕의 초청으로 왕궁을 방문해 일본과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훈장을 받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한국의 국보급 도예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 경북도가 시행한 중요무형문화재 구술채록 연구대상자로 선정된 것은 도예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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