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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울산 울주군 망해사

2020-05-01

고요한 절집 마당엔 연분홍 꽃들만 날뛰며 호들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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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 망해사. 경내에 들어서면 곧바로 대웅전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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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섬 바다 가까운 산에 난다는 팔손이가 넉넉한 손을 펴 부처님께 그늘을 공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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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뒤편에 우뚝 서 있는 석가여래와 지장보살.

꽃 세상이었다, 봄은. 사람들이 서로 거리를 두고 애달파 하는 동안 꽃들은 서로 기대고 비비며 마음껏 환하였더라. 철쭉의 말 없는 환호에 뭉클해진다. 온화한 낯빛을 사방으로 펼친 불두화에 평온해진다. 끊임없이 물줄기를 쏟아내는 용의 머리 위로 겹 벚꽃 꽃잎이 가볍게 내리어 큰 수조에서 작은 수조로 흘러 다니고 붉은 동백은 그늘에서 빛으로, 빛에서 그늘로 바람과 함께 뒹군다. 남쪽 섬 바다 가까운 산에 난다는 팔손이는 그 넉넉한 손을 펴 부처님께 그늘을 공양하고 꽃 먼저 떠나보낸 수선화 잎들은 부드럽게 한데 모여 서로를 의지한다. 이 고요한 호사에 멋쩍으나 헛기침도 못하겠다.

◆영축산 망해사
신라 헌강왕 때 동해 용을 위해 건립
대웅전 뒤 정원 첫단에 모신 지장보살
두번째 단에는 석가여래와 작은연못


영축산(靈鷲山) 망해사(望海寺)라 새겨진 돌비석 뒤로 꽃나무가 궁륭을 만든다. 그 속에 대웅전 어간 유리창이 하늘과 수목을 담고 있다. 그 하늘 향해 담쟁이가 계단을 오르고 날렵한 팔작지붕은 이륙을 준비한다. 불교대학을 운영한다는 작은 2층 건물 입구에는 건물만큼이나 키 큰 동백나무가 꽃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대웅전 앞 겹벚꽃은 감로차(甘露茶)라 이름 새겨진 수조 위로, 커다란 목단의 얼굴 위로, 숨은 듯 빗겨선 키 작은 동백 위로 훨훨 꽃비를 내린다. '바다를 본다'는 절집 망해사 마당에서 꽃들의 호들갑에 화들짝 몸을 돌린다.

가파른 계곡과 먼 도심지가 내다보이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망해사는 신라 헌강왕 때 처음 지어진 절이라 한다. 그 창건 설화가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 편에 전해진다. 어느 날 헌강왕이 울산 남구의 세죽해변으로 나들이를 갔다가 물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 구름이 하늘을 덮고 이내 안개마저 자욱해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왕이 주변에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는 동해용의 조화입니다. 용왕을 위한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왕은 "그렇다면 용을 위한 절을 지어라"고 하였고 이 한마디에 맑고 푸른 하늘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동해 용을 위한 절이 바로 망해사다.

자신을 위해 절을 짓는다는 말을 들은 동해 용은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헌강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아들을 왕에게 보내어 보좌하게 하였는데, 그가 바로 처용(處容)이다. 치병의 술사, 처용. 그는 전염병을 극복할 만한 의술이 없던 시대에 사람들이 의지했던 간절함이었다. '구름과 안개가 걷힌 바닷가'는 현재 개운포(開雲浦)다. 망해사가 앉은 방향은 정확히 개운포로 향한다고 한다. 그 거리가 약 15㎞ 정도라 한다.

망해사가 언제 어떻게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순조 때 간행된 '울산군읍지'와 철종 때의 '대동여지도'에는 망해사가 나타나지만 1899년의 울산군읍지에는 이미 폐찰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절터는 오래 농지로 이용되다가 1957년 영암(影庵)스님이 발굴해 당우를 세우고 주변을 정리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기틀을 잡았다고 한다. 대웅전 오른편에는 삼성각과 종각이 자리한다. 대웅전 뒤쪽에는 단을 이룬 정원이 북서방향으로 펼쳐져 있어 화계라 할 만하다. 첫 단에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두 번째 단에는 석가여래를 모셨고 작은 연못을 두었다. 뿌연 물속에 팔뚝만 한 잉어들이 재빠르게 움직인다. 홍매와 백매는 잔인한 계절에 피고 졌을 테고, 곧 붉은 장미와 때죽나무 흰 꽃이 피겠다. 그리고는 목백일홍의 나날이 온다. 꽃은 제때 피고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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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각 축대 옆에 동백과 겹벚꽃, 목단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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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차 물줄기 따라 꽃잎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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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뒤편 화계의 두 번째 단에는 석가여래를 모셨고 잉어 노니는 작은 연못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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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73호인 울주 망해사지승탑. 신라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망해사지승탑
화계 셋째단, 가장 높은자리 2기 승탑
동쪽 탑신·옥개석 일부 파손 생채기
100m 위 망해대 터 울산 앞바다 조망


돌연 세찬 바람이 분다. 그러자 새들이 맑게 울고 연분홍의 꽃비가 내려 뺨과 어깨를 스친다. 고개를 들어보니 돌로 쌓은 축대 위로 솟은 돌탑의 머릿돌과 꽃나무 우듬지가 짐짓 시선을 거둔다. 화계의 세 번째 단, 가장 높은 자리에는 보물이 있다. 보물 제173호인 망해사지승탑이다. 높은 축대 위 널찍하고 양지바른 대지에 종형의 부도 하나와 2기의 승탑이 서 있다. 두 승탑은 헌강왕의 재위 기간인 875년에서 886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 승탑의 높이는 3.4m, 서쪽 승탑의 높이는 3.3m 정도다. 서쪽의 것은 거의 완전한 상태이지만 동쪽의 것은 탑신과 옥개석 일부가 파손되었고 여기저기 생채기가 많다.

어느 존경을 받던 이의 부도탑일까. 동쪽 승탑은 파손돼 있던 것을 1960년 11월 복원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내부의 사리공이 도굴되면서 무너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붕돌 최상부의 장식인 상륜(相輪)은 두 승탑 모두 사라졌지만 그 일부가 따로 보관되어 있고 1960년 이후 발견된 각종 기와와 그릇 조각 등도 보관돼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것들 가운데 '가정(嘉靖) 23년 갑진(조선 중종 39년, 1544년)'이라 새겨진 기와가 있다. 명문기와는 망해사 창건 이후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으로, 그때 중건 불사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승탑의 대지 가장자리에 겹벚꽃이 화사하다. 나무 아래에는 깨진 석재 부재들이 처연히 앉았다. 꽃잎들이 그들 위로 쏟아진다.

높은 축대 위의 승탑 앞에서도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저 먼 산 마루금 너머가 분명 바다일 것 같은데. 원래 망해사의 대웅전 터는 승탑의 위쪽에 있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소나무와 대나무로 우거진 숲속, 그곳에서는 바다가 보인다고 한다. 절에서 100m쯤 올라가면 망해대 터가 있다고도 하고 그곳에 서면 울산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고도 했다. 멀리 울산 시가지가 하얗게 보이고 보다 가까이로는 문수축구장이 보인다. 어쩌면 나의 어두운 눈 탓일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두고 바다를 보지 못하는.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향으로 가다 언양분기점에서 울산선으로 갈아탄 뒤 울산IC에서 내린다. 신복고가차로에서 문수축구경기장·법원·경찰청 방면으로 가다 옥현네거리에서 7번 국도 부산 방면으로 가면 문수축구장을 지나고 곧 오른편에 율리 시내버스 공영차고지가 보인다. 차고지 입구 앞을 지나면 곧바로 오른쪽 산으로 드는 길 초입에 망해사 이정표가 있다. 산길 따라 절집 입구까지 차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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