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것은 하고 싶지 않다 힘들지 않다면 그림은 기술에 불과하다"
![]() |
| 02_KOO JA-HYUN, Untitled, 227.3x182.1cm, PIGMENT, LINEN, GOLD LEAF, |
삶은 과정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라면, 삶은 그저 죽음일 뿐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 사이를 촘촘하게 채우는 것은 결국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다. 고만고만한 삶들이 서로 다른 각자의 색과 빛으로 반짝일 수 있는 이유다. 어찌 인생만 그렇겠는가.
판화가 구자현에게도 무엇을 그리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그리는가, 그것이 그의 평생 화두였다. 꽃이든 풍경이든 인물이든 그것을 그리는 작가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으니. 하지만 구자현처럼 그리는 작가는 오직 그 자신 밖에 없다. 이것이 구자현의 작업을 특별하게 만든다.
![]() |
| 03_KOO JA-HYUN, Untitled, 193.9x130.3cm, PIGMENT, GOLD LEAF ON CANVAS |
그는 흔히 쓰는 캔버스, 회화라는 용어대신 꼬박꼬박 '타블로'라고 불렀다. "파블로는 단품 평면회롸를 의미한다. 판화는 판을 매체로 한 회화로 판화도 회화다. 판화는 한 기법일 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판화작가인 구씨는 이번 전시에서 황금과 백금 배경의 템페라 대표작을 선보인다. 템페라는 계란이나 아교질 등의 용매에 색채가루인 안료를 배합한 물감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물감대신 금박과 백금박을 그림 그리듯 입히는 황금배경 템페라의 작품들은 그저 그런 금박 페인팅이 아니다. 두께 0.001㎜ 안팎의 금박은 정전기만 일어도 사방으로 찢겨 버린다. 고도의 몰입 속에서 극도의 정교함과 섬세함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과정에서 얻는 느낌이 좋다. 노력을 즐기는 편이다. 어떤 그림이 되느냐 하는 결과 보다 어떤 노력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게 작가다."
그의 말처럼 그는 시간과 노력이 아주 많이 들어가는 비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고수한다. 직접 생지를 골라 여러번 손빨래를 하고 삼베를 붙여 판을 만든 다음 아교에 석회를 섞어 반복하여 칠한 뒤 깎아내 비로소 바탕을 완성한다. 지루할 뿐 아니라 힘들기까지 한 작업이다. 얼마든지 쉬운 방법으로 만들 수 있는 평면을 이같이 반복적인 동작으로 일관하는 것은 같은 작업 과정이 거듭될수록 더욱 '완전한 평면'에 도달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렇게 캔버스가 완성되면 작업은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는 이를 '회사후소(繪事後素)'라 했다. 휜 바탕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말이지만 ,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 |
| 구자현 |
그렇게 만들어진 캔버스엔 세상에서 가장 희다는 '티타늄 화이트'가 내려 앉는다. 그 위로 금과 백금이 재료의 고유한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얹혀진다. 절대적 평면과 절대적 화이트가 구현해낸 절대적인 화면, 그는 이를 '그리지 않은 회화'라고 불렀다. 바탕을 살리고 물성을 살리며 가능한 무의미하게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쉬운 것은 하고 싶지 않다. 힘들지 않다면 그림은 기술에 불과하고 작품은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
평생을 판화 작업에 몰두해 온 그는 지난해 석판화, 목판화, 스크린화 등 400여점의 작품을 수록한 '전판화 도록'을 발행했다.
그는 "판화는 시고 회화는 소설이다"고 했다. "판화는 이지적이며 함축적이다. 찍어내는 순간부터는 손을 못댄다. 그저 사인을 할 뿐이다. 그래서 어렵다. 어려워서 매력있다."
이번 전시에는 최근 작업한 타블로 신작 50여점이 선보인다. 한지를 접어 교차되는 선 위로 금박을 입힌 한지 종이 작업 20여점도 함께 선보인다. 화면의 완벽성과 섬세한 표현력이 절제된 감응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글·사진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