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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박경리의 말…소설 '토지' 속 명문장들, 삶의 길잡이가 되다

2020-07-18

등장인물 대사·작가의 말 되새기며
3개 주제로 솔직담백한 메시지 전해
혼란한 세상서 '고전의 매력'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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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소설가의 모습. '박경리의 말'은 선생의 대표적 소설 '토지' 속 문장과 생전 작가가 남긴 말들을 모은 에세이다. <천년의 상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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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숙 지음/ 천년의상상/ 288쪽/ 1만5천300원

"가난한 것은 수치가 아니다. 일을 해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척박한 땅에 사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사로잡혀 사는 거야말로 수치다."

소설 '토지'에서 '서희'의 둘째아들 '윤국'이 한 말이다. 항일운동을 하던 윤국의 선배 '홍수관'은 경찰서 유치장에 잡혀가 당장 전향 선언을 하지 않으면 퇴학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는 오열을 터뜨리며 조선 독립을 위해 살겠다고 외쳐버린다. 이는 신념을 위해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가난과 고단한 삶으로 밀어 넣는 순간이었다.

윤국은 세월이 지나 졸업을 제대로 못 한 탓에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며 남루한 모습으로 살아가던 황수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가난한 것은 수치가 아니다…." 황수관의 모습을 본 윤국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혹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 때문에 가난한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사로잡혀 사는 것'이라고 문장은 말한다. 적어도 수관은 '사로잡히지 않았기'에 그의 삶은 힘들지언정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소설 '토지'는 한말에서 광복까지 60여년 역사를 배경으로 민중의 삶을 생생히 재현해낸 뛰어난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2008년 세상을 떠난 박경리 선생은 1969년 9월 토지 첫 회의 연재를 시작한 뒤 1994년 8월15일 마지막 원고를 탈고하기까지 25년간 이 작품을 집필했다. 등장인물만 600명이 넘는 소설로, 다양한 인간 군상과 인생들을 만나볼 수 있다.

'박경리의 말'은 오랫동안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를 읽고 연구하고 가르쳐 온 저자가 '토지' 속 문장과 선생의 생전 '말'들을 모아 그 깊은 의미를 찾아가며 독자와 함께 사유하는 책이다.

책은 '나에게 스며드는 말' '질문하는 젊은이를 위하여' '우리 곁에 있는 사람' 등 세 개의 큰 주제 아래 다양한 박경리 선생의 말과 토지 속 문장을 담고 있다.

책 속 문장들은 '아름다운 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자신이 고른 박경리 선생의 문장은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겨우 견디어 내뱉는 말, 실 한오라기 같은 기쁨을 잡으려는 말, 칠흑 같은 어둠을 버티려 안간힘 쓰는 말, 그래서 애달프고 간절한, 그런 말들. 또 대단치 않은 사람들의 예사로운 말들'이라고 전한다.

"목이 메어 강가에서 울 적에 별도 크고오 물살 소리도 크고 아하아 내가 살아 있었고나, 목이 메이면 메일수록 뼈다귀에 사무치는 설움, 그런 것이 있인께 사는 것이 소중허게 생각되더라."(40쪽)

식민지 조선에서 간도 땅으로 흘러들어온 '주갑'이란 사람의 심정을 담은 말이다. 제 나라를 떠나거나 쫓겨난 사람들의 피신처였던 간도에서 주갑은 역경 속에서도 삶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내사 머어를 믿는 사람은 아니다마는 사는 재미는 사람의 맘속에 있다 그 말이지. 두 활개 치고 훨훨 댕기는 기이 나는 젤 좋더마."(66쪽) 토지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윤보'의 말이다. 불의와 맞서 싸우지만 기질적으로 자유로운 인물인 윤보는 '사는 재미는 각자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또 다른 말도 인상적이다.

"사람 사는 기이 풀잎의 이슬이고 천년만년 살 것 같이 기틀을 다지고 집을 짓지마는 많아야 칠십 평생 아니가. 믿을 기이 어디 있노. 늙어서 벵들어 죽는 거사 용상에 앉은 임금이나 막살이하는 내나 매일반이라."

"안하는 것은 쉽고 하는 것이 어려워."(156쪽) 주인공 '서희'가 아들 '환국'에게 한 말이다. 식민지 치하 청년으로 살아가는 아들이 행여 공부를 포기할까 봐 아들을 다독이면서 서희는 이런 말을 한다.

"인생에 대한 물음, 진실에 대한 물음은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끝이 없게 그 물음에 매달리는데 '모른다'라는 그 말만이 확실한 것 같아요."(182쪽) 2004년 박경리 선생이 국내 한 잡지사와의 대담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써낸 노년의 소설가도 인생에서 '모른다'는 말만 확실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진영(陣營)'을 갈라 싸우는 이들이 많은 요즘, 작가의 '모른다'는 말이 그 어떤 확신보다 훨씬 지혜롭고 품위 있게 느껴진다.

저자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느 세상일지라도 나는 나이고, 내가 내 삶을 살아간다는 대단히 소박한 사실은 그대로이다. 단순한 그 사실이야말로 일제강점기의 '토지' 속 사람들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의 인간이, 아니 인간이 인간인 한 그렇게 살아가야 할 모습일 것이다. 박경리 선생은 그 인간을, 그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오래된 책을 두고, 거울에 나를 비춰보듯 그렇게 인간의 삶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들려오는 전염병 소식과 안타까운 뉴스들에 마음이 무거운 요즘이다. 세상은 혼란스럽고 인간이란 존재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시대를 뛰어넘어 세상과 인간을 탐구하고, 삶을 통찰하는 '고전'에 답을 구하고 싶다.

박경리 선생이 남긴 말들이 때론 죽비처럼, 때론 따뜻한 솜이불처럼, 지치고 퍽퍽해진 마음에 스며든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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