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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빙경(氷經)

202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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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은 겨울을 딛고 얼음결로 건너간다. 언다는 것. 감금된 물의 시간들. 해석은 바람의 몫인가. 꽝꽝한 저 '빙경(氷經)'.

트럼펫의 음색으로, 아니 코뿔소뿔처럼, 시위대의 주먹처럼 누워있는 그대. 거대한 고등어 한 마리 같은.

얼음도 두 버전이 있다. 작품형과 상품형. 우린 이제 제대로 된 빙판을 만날 수가 없다. 울진 금강송 같은, 빙하 속 수천억년 억눌려 푸른듯 옥빛이 감도는 압빙(壓氷) 같은 걸작형 빙판을 볼 수가 없다. 일상의 빙판은 냉장고 각얼음 같다. 모양만 얼음이다. '결기(決氣)'가 누락된 탓이겠지.

물결은 왜 얼음결로 변신하는가. 시퍼렇고 누릇하고 우툴두툴하고 옥처럼 곱다가 사포처럼 거칠하기도 하고…. 그만의 독백이 도자기 곁면에 서린 '빙렬(氷裂)'처럼 꽂혀 있다. 얼음의 살결. 저 오묘한 이미지는 뭔가?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의 상형문자, 수메르인의 설형문자랄까.

얼음을 보면 황홀(恍惚)하다. 황홀은 대립하는 두 물성이 절정의 방식으로 충돌하는 방식이다. 예술도 '황홀족'이다. 자기를 가장 잔인하고 불리하게 몰아세울 줄 안다.

레코드판으로 변한 빙경. 판소리와 블루스를 밧줄처럼 묶어 들려준다. 둘은 왜 통하는가? 피범벅 일상이 승화란 버전으로 개화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랄까!

이념은 최상위 포식자인가. 한 이념이 다른 이념을 참수한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이념의 눈동자는 저승으로 못 간다. 한말, 일제가 한반도를 집어삼켰을 때 분출했던 선비의 자결, 가난이 다반사였던 민초의 악 다문 어금니의 분노, 하악골의 진동…. 절규·비명·함성이 굽이굽이마다 스크럼을 짰다. 치유되지 못한 비극과 저주들, 매년 동장군은 제사장이 되어 그것들의 가로·세로획을 빙체로 서늘하게 요약해 놓는다. 세월의 살풀이랄까.

1만미터를 더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마리아나 해연 맨바닥의 고요와 침묵의 두께. 숭고한 것은 퇴로가 없다. 기타를 위해 태어났다고 하는 세고비아, 그가 죽을 즈음 한 인터뷰에서 이런 고백을 했단다. '다들 내가 얼마나 잘 치는 가에만 관심이 있다. 하지만 나는 늘 내가 얼마나 기타를 못 치는 가에만 관심이 있다.'

내 고향 동네 언덕배기에 기우뚱 서있는 외딴 집. 유난히 대나무가 많아 항상 바람이 들끓었다. 그 집 주인 사내는 빈둥지 같았다. 미래는 바닥나고 오직 과거의 힘으로 버티는 것 같았다. 마을 어른들은 그 집을 '빨간집'이라 낙인찍었다. 빨간집 지척에 용소(龍沼)가 있었다. 한겨울 꽁꽁 언 용소는 '옥새(玉璽)'같다. 어린 나는 성스러운 그 빙판에서 또래들과 스케이트를 탔다. 해쓱한 사내의 미소는 겨울 움파보다 더 푸릇했다. 사내는 색깔 때문에 피기도 전에 져버렸다. 용소는 사라지고 지금 그 자리엔 아파트가 서 있다.

올해는 제대로 춥다. 대구 모처에서 잘 생긴 얼음장을 친견할 수 있었다. 얼음판에 돋아난 마른 풀 몇 가닥. 고향 그 사내의 머리카락처럼 보였다. 그를 위한 제문(祭文)으로 충분할 것 같아 빙체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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