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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미애의 문화 담론] 잊힌 향인 정조문…일제가 약탈한 우리 문화유산 환수에 평생을 바치다

2021-03-05

日 파친코업계 대부·재일동포·예천 사람

정조문
"예천 사람 정조문을 아시나요?" 몇 해 전 서울 인사동 찻집에서 만난 한 미술사학자가 전한 얘기다. 예천 사람 정조문(鄭詔文·1918∼1989)은 일본에서 자수성가한 재일동포.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파친코업계의 대부로 알려져 왔다고 한다. 얼핏 듣기엔 미술사학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인물이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그는 10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부모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배운 것도 없이 등짐을 나르는 부두노동자로 전전하다 1950년대 초반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를 누릴 때 주일미군 사이에 유행한 슬롯머신, 즉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어 떼돈을 벌고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평소 봐왔던 호텔 석조장식물
조선밀반출 유산 알고 큰충격
열도에 산재한 우리 문화유산
30여년 걸쳐 1700여점 사들여
日법률 묶여 국내 못들여오자
교토 고려미술관 건립해 보존
불법반출 문화재 돌려주는 獨
日도 반환 모범사례 본받아야
냉각된 한일관계 풀려 나갈것

그러나 그는 칠순에 생을 마칠 때까지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 이념 성향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일 국교 정상화 후에도 이념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맨주먹으로 거부의 반열에 오른 철저한 자본주의자였다. 이후 돈이 남아돌자 달항아리를 비롯한 조선백자에 심취하다가 마침내 석조(石彫)유물에까지 눈을 돌리게 된다.

그 당시 도쿄의 유명한 오쿠라 호텔이나 뉴오타니 호텔 등 특급호텔에는 조선시대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석등(石燈)을 정원 장식용으로 버젓이 전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 이 호텔을 드나들며 무심히 봐왔던 이들 석조 장식물이 뜻밖에도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밀반출된 약탈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일본 열도에 산재해 있는 우리 문화유산이라면 무조건 사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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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미술관 앞 문인석과 무인석.
불법 유출된 우리 문화유산을 되찾아야겠다는 집념에서 마침내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했다. 그가 1950년대 후반부터 30여 년간에 걸쳐 수집한 우리 문화유산은 모두 1천700여 점. 그러나 문화재 반출이 금지된 일본 국내법에 묶여 우리나라에 들여오지 못하고 개인 박물관을 세워 보존하다가 작고했다. 일본 교토의 '고려미술관'이 그가 세운 박물관이다.

고려미술관 입구에는 좌청룡·우백호를 상징하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고 너른 정원에는 석등과 석비 등 각종 석조유물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그가 박물관 이름을 굳이 '고려미술관'으로 고집한 것도 이념성향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념을 떠나 우리 문화유산 보존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게다가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예천 사람'임을 강조할 만큼 애향심도 강했으나 정작 잊힌 향인(鄕人)이 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 불법으로 유출된 우리 문화유산 환수 문제는 광복 이후 줄곧 제기돼 왔으나 아직도 한·일 양국 간에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일본 정부가 강점기 당시 정당한 절차를 밟아 반출한 문화재라는 이유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문화재 대부분을 개인이 소장하고 있어 일본 정부가 일일이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동안 양심적인 소장가들이 기증형식으로 반환한 일도 더러 있었으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최근에도 한국의 민간단체 '우리옛돌문화재단'이 보기 드문 조선조의 무인석과 석등, 수병(水甁) 등 문화유산 8점을 되찾아왔다. 기증자는 오자와 데리유키(尾澤輝行). 1920년대 군수산업을 일으켜 부를 축적한 그의 외조부가 조선에서 수집해 정원석으로 사용해 왔다고 했다. 소장가 오자와는 3대째 이 석조유물을 관리해 왔으나 "조선시대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신념에서 옛돌문화재단에 무상으로 기증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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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미술관 내 오층석탑과 석등.
우리나라 석조문화유산인 문인석과 무인석은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생전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거대한 바윗돌을 깎아 만든 등신상의 조각품으로 왕릉 주위에 세우는 일종의 능지기이자 수호신이다. 문인석은 조복(朝服)을 갖춘 문신(文臣)의 머리에 관모(冠帽)를 쓰고 양손에 홀(笏·패)을 든 능묘(陵墓) 조각상이다. 흔히 장군석으로 불리는 무인석은 갑옷 차림에 투구를 쓰고 검(劍)을 쥔 호위무사의 상징으로 왕은 사후에도 문무백관을 거느린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통일신라(676년) 이후 제정된 왕실의 능묘제(陵墓制)가 효시로 성덕왕릉과 흥덕왕릉의 문인·무인석이 대표적인 능묘 조각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고려조를 거쳐 유교 문화를 꽃피운 조선조 후기에는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정승·판서 등 벼슬아치들의 묘지에도 문인·무인석을 세웠다고 한다. 게다가 사대부가에서는 묘지 좌우에 망주석(望柱石)을 세우는 풍습이 생겨나 망주석 능묘조각은 현대에도 미풍양속으로 전해지고 있다.

석조유물은 요즘에도 전국 곳곳에 방치돼 있으나 사람들은 흔히 눈에 띄는 석물(石物)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봐 넘기고 있다. 시중에는 기계로 깎아 만든 각종 석물이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옛 조상들은 돌을 단순한 돌로 보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갈고닦아 훌륭한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후세에 남겼다. 일제 강점기 거류민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이런 석조유물을 수집해 일본으로 실어날랐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우리 석조유물에 유달리 관심이 높았다. 정원석으로 사용하는데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우리 민족의 반일감정을 우려해 문인석과 무인석의 수집 및 반출금지령을 내리자 흔한 석등과 망주석에 눈독을 들였다고 한다. 일본 열도는 고온다습한 기후여서 석조 유물을 정원에 배치해두면 습기를 막을 수 있고 정원의 운치를 높여주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문·무인석이나 12지상은 집과 가족의 안위를 지켜주는 벽사수복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연유다. 현대에도 1970년대엔 일반 묘지의 망주석까지 뽑아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다 적발된 일도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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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애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미술학 박사
일본은 광복 이후에도 우리 문화유산을 가져가기만 하고 되돌려줄 줄 몰랐다. 그러나 같은 전범국이면서도 독일은 달랐다. 독일 연방정부는 2020년 한국의 문인석 한 쌍이 불법 반입된 사실을 밝혀내고 자진해서 한국 정부에 되돌려 주었다. 독일 로텐바움 세계문화예술박물관은 동아시아 문화재 수장고의 미술품을 점검하던 중 16∼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문인석 한 쌍을 발견하고 반입 과정을 조사했다.

그 결과 1983년 서울에 주재하던 독일인 사업가가 인사동 골동품상에서 매입해 귀국할 때 이삿짐 컨테이너에 숨겨 들여온 것을 1987년 박물관에서 구입한 사실을 확인하고 "남의 나라 귀중한 문화유산이 불법 유출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점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반환키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세계 각국의 문화재 불법 반출과 양도를 금지한 유네스코 국제협약 정신을 살린 독일 정부의 모범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강자의 논리로 남의 나라 역사까지 왜곡한 일본 정부가 독일 정부의 문화재 반환 결정을 본받아야 얼어붙은 한·일 관계가 제대로 풀려나갈 것이다.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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