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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빵은 대구'로 보는 대구빵의 어제와 오늘 (1) 대구가 기억하는 빵집

2021-07-02

한강 이남 최고의 빵공장 '수형당' 1950~60년대 해태·삼립과 어깨 나란히
대구 최초 즉석도넛 개발한 맘모스, 뉴욕·뉴델·안동 맘모스로 기술 전파
삼덕동 형무소 앞 삼미제과, 매일 아침 수형자들에 잊지 못할 '빵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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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를 빵과 커피의 도시로 만들고 싶어 하는 대구시가 최근 '빵은 대구〈사진〉'란 제목의 '빵 스토리 북'을 출간했다. 지역 제과·제빵인들과 협업작업을 통해 어렵사리 대구빵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인문학적 고민을 해 본 것인데 기자도 동참했다. 이 책을 계기로 대구빵, 그 뒤안길을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원래 한국엔 빵이 없었다. 1910년쯤 일본의 파티시에(Pattissier·제빵사)가 한국에 들어온다. 1920년 한국 최초 양과자점인 '메이지야(明治屋)'가 서울 충무로에 등장한다. 경부선(1905년 개통)에 이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1970년) 전까지 한국 경제의 중심축이 대구라 해도 될 정도로 대구는 2차 산업의 메카 구실을 하고 있었다. 6·25전쟁이 몰고 온 풍부한 군수물자, 그리고 독보적인 섬유산업, 서문·칠성·약전시장이 가동한 광대한 식품산업 인프라 덕분이었다.

대구빵은 당연히 일본빵의 영향권에 있었다. 6·25전쟁 이후 미국발 밀가루 원조가 본격화됐을 때부터 대구는 비로소 명실상부 제빵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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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공장 빵 양산시대를 이끈 교동시장 내 수형당. 1950~70년대를 호령했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대처하지 못해 침몰하고 말았다. 대구시 중구 문화동 옛 수형당 자리(왼쪽)와 상표.

'대구빵 역사투어'의 첫 단추는 한때 한강 이남 최고의 빵공장 중 하나로 불렸던 교동시장 내 '수형당(秀亨堂)'에서 시작해야 된다. 수형당(진병수)은 1946년쯤 등장했다. 1950~60년대만 해도 해태·삼립과 어깨를 겨뤘고 점차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면서 '수형 그룹'으로 웅비할 야심찬 프로젝트를 짰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수형당 편이 아니었다.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1982년쯤 침몰하고 만다.

수형당은 대구 제빵산업의 기틀을 잡아준 기업이다. 훗날 '대구빵의 중흥조'로 불리는 뉴델제과(최종수), 런던제과(조원길), 지역의 첫 케이크 전문점 최가네의 최무갑 사장, 풍차베이커리(권영오) 등도 수형당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수형당은 왜 침몰했을까? 관계자들은 주먹구구식 경영과 무리한 사업확장 등을 파산 이유로 꼽는다. 게다가 1970년대를 주름잡은 쟁쟁한 제과점들이 개발한 케이크가 수형당의 단팥·크림빵을 밀어낸 것이다. 사람들의 입맛이 변하고 있었지만 수형당은 그걸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미성당·편의방 등 각종 분식점과 별별 식당들이 등장했고 패스트푸드까지 대구를 향해 진격 중이었다. 최근 사라진 수형당의 영광을 살리기 위해 이월드(옛 우방랜드) 측이 이례적으로 수형당 브랜드를 부활 중이란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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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처음으로 모닝식빵을 선보인 풍차베이커리. 권영오 사장은 지난해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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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오픈해 메론빵 돌풍을 일으킨 밀밭베이커리 입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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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동아백화점 여직원이 모두 단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던 공주당. 1982년 문을 열어 아직 영업을 하고 있다.
고려당
구운 밤처럼 생긴 우레볼로 유명한 강대건 고려당은 1994년 향촌동에서 수성시장 옆으로 이전했다가 폐업된다.

수형당이 전성기를 구가하던1950~60년대를 주름잡은 추억의 빵집들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삼미(三美)제과사, 삼송(三松)빵집, 송영사, 수형당 등은 광복 직후 대구의 '4인방 빵'으로 불렸다. 한때 중부경찰서 네거리는 '빵거리'로 군림한다. 이들 3인방의 뒤를 이어 옛 대구극장 초입 고려당, 중부경찰서 바로 북측에 일성당(사장 김도권), 바로 옆에 동양당, 종로초등 정문 맞은편에 덕인당, 대구역 앞 대우센터 뒤편에 구일제과점(박태준), 동성로 미도방 맞은편에 풍년당, 종로초등 근처에 풍곡당(사장 이을수), 약전골목 동문 근처엔 백일당, 학원서림 부근 맘모스 등도 자기 방식의 '빵몰이'를 한다.

구일제과는 건과자로 유명했다. 60년대를 화려하게 물들인 맘모스의 기술은 뉴욕을 거쳐 뉴델로 이어져1970~80년대 대구를 '빵의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 도넛을 개발해 지역 제빵 문화를 한 단계 성숙시켰고 그 흐름이 안동 맘모스로도 번진다.

그 무렵 잘 나가는 7개 제과점(삼미, 삼송, 고려당, 수형당 등) 주인들이 모여 '7인회'를 결성한다. 이들은 모두 북성로에 있었던 일본 빵집 이마사카 출신이었고 다들 유도 유단자였다. 특히 삼미제과사는 중구 삼덕동 대구형무소(1910년 대구감옥으로 출발해 1923년 대구형무소, 1961년 대구교도소로 개칭한 뒤 1971년 6월1일 화원으로 이전) 정문 바로 근처에 있어 수형자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의 빵집이 된다. 바람이 불면 빵 굽는 냄새가 형무소 담 안으로 들어갔던 모양이다. 최 사장은 1950년대 초 수형당보다 앞서 군에 빵을 납품하기도 했지만 친구인 진 사장의 사업 수완을 이겨내지 못하고 1957년쯤 좌초된다. 현재 동성로 통신골목에 자리를 잡고 있는 최가네 케이크 사장 최무갑이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젠 손자까지 뛰어들어 3대 빵 가문이 됐다.

아무튼 7인회는 뉴델제과 사장 최종수가 주축이 된 '과우회(菓友會)'로 발전한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빵은 대구'로 보는 대구빵의 어제와 오늘 (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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