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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대구의 자존심 '경상감영' 복원사업..."우체국 건물 이전해야 제대로 된 복원 가능"

202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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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은 1601년에 대구로 옮겨 온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다.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대구유형문화재 1호). 영남일보 DB

경상감영((慶尙監營) 복원 사업을 위한 대구시민 서명운동이 전개되면서 해당 사업에 귀추가 주목된다.

대구는 고대부터 조선시대 이르기까지 주요 행정지역이었다. 특히 경상감영의 이전은 대구가 경상권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경상감영은 본모습을 잃었다. 진입로에 있던 관풍루는 현 달성공원 부지로 옮겨졌고 부속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일본군 헌병대 건물과 병무청 등이 들어섰다. 이후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상감영 복원은 우선순위에서 배제됐고 현재 일부 건물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현재 대구시는 경상감영 주요시설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경상감영의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을 재조명해보고 향후 복원 방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 대구, 경상의 중심이 되다

전국을 8도 체제로 유지했던 조선시대, 각 도의 지방행정 최고 관직은 바로 '관찰사'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머물며 업무를 보는 관청을 의미하며 경상도의 감영을 경상감영이라 일컫는다.

경상감영이 처음부터 대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상도는 타 도에 비해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건국 초기 당시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우도로 나눠져 관리됐다. 세종에 이르러 상주에 감영이 들어섰으나 이후에도 성주, 달성, 안동 등으로 수차례 이전이 이뤄졌다.

1601년(선조 34년) 경상감염이 지금의 대구에 설립됐다.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나눠진 1896년 이전까지 경상도 전체를 다스리는 최고 관청이었다. 경상감영이 들어선 이후 대구는 명실상부 경상도의 중심도시로 발돋움했다. 인적·물적 자원이 유입되면서 급속히 도시화를 이룬 것이다.

입지를 보면 감영은 한성부와 연결되는 도로망에 배치되고 주변 연계성을 고려해 각 도 내에서도 교통의 중심 역할을 했다. 경상감영을 보호하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파괴된 성을 다시 축조하면서 대구읍성이 조성됐다. 당시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민응수가 조정에 축성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읍성은 1736년(영조 12년) 착공, 이듬해 완공됐다. 이로써 군사적 요충지로도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조선 후기 상공업 발전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읍성 서쪽에 위치한 달서문 밖에는 장이 열렸는데 이는 '서문시장'으로 한양, 평양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으로 명성을 누렸으며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감영 객사 마당에서 시작된 '약령시'는 일제시대 남성로(약전골목)로 이전됐으나 여전히 대구의 명소 거리로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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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총쇄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경상감영' 배치(출처: 경상감영복원정비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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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으로 이전하기 전 경상감영의 관풍루. 영남일보 DB
◆ 조선후기 감영건축의 산실
경상감영은 설립 후 3차례의 화재를 겪었다. 마지막 화재 발생한 1806년(순조 6년), 주요 건물이 전소됐고 대대적인 중건 작업이 진행됐다. 이는 전국 8도 감영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8세기 중반 이후 관찰사의 권위가 확대됐고 감영의 기구도 확대되면서 구성 건출물도 더 늘었다. 정확한 규모를 기록한 문서는 남아있지 않지만, 1870년(고종 7년) 경상감영을 포함한 대구부성 내 총 882칸을 증축 혹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인현감을 지낸 오횡묵의 '자인총쇄록(1888년)'에는 경상감영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와 당시 구성에 대한 추측이 가능하다.

경상감영은 △진입공간(중삼문, 내삼문 등) △업무 중심공간(선화당, 징청각) △업무 지원공간 △경찰·군사 업무공간 등 크게 4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업무중심공간에는 감사와 부속관원 및 실무자들이 사용하던 시설이 위치해 있었고 징청각 주변에는 이들을 위한 휴식시설도 마련됐다. 업무지원공간은 주로 보좌역을 맡았던 관리들이 이용했고, 경찰·군수업무 공간은 선화당 동쪽으로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타 지역과 비교하면 대구는 유적이 더 많이 남아있으며 원형을 회복할 경우 본래 모습에 가장 가깝게 복원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조영화 교남문화유산 대표는 "감영의 가장 주요한 건물인 선화당과 징청각의 건립 당시 골격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곳은 경상감영 뿐이다"며 "선화당은 조선 후기 감영의 변화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고 징청각은 전국에서도 유일해 그 가치가 높다. 정문인 관풍루 역시 경상감영의 상징성을 높이는데 크게 공헌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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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진으로 본 경상감영 배치도. 경상감영 경관복원을 위한 우정사업본부 대구우체국의 조속한 이전 철거를 촉구하는 시민모임 제공
◆ 복원 사업 어디까지 왔나
대구시는 경상감영 복원을 지난 2013년부터 본격 추진하고 있다.

자체 조사를 통해 객사 위치, 경상감영 주요 건물 배치도 등을 발굴했으며 복원·정비를 위한 용역 연구를 완료했다. 경상감영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2년여 간 심사 과정을 거쳐 현재 '대구 경상감영지'는 사적으로 지정된 상태다.

이후 구 병무청 터를 매입하고 소유권을 이전 받음으로써 달성공원에 있는 관풍루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게 됐다.

병무청 철거공사를 마치고 지난해 진행된 매장문화재 정밀발굴조사에서는 경상감영 진입로 흔적을 확인하는 성과를 이뤘다. 주 진입공간인 관풍루, 중삼문 기초시설을 비롯해 부속건물지 흔적이 드러나면서 그동안 기록으로 짐작만 가능했던 경상감영 원형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었다. 이밖에 선화당 마당에 배치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도 다수 발굴되기도 했다. 현재 구 병무청 부지 일원 사적 추가지정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경상감영 복원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선 우체국 건물 이전을 완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관풍루와 중삼문으로 이어지는 진입공간에 우체국이 너무 가까이 있어 본래 모습을 되찾기 힘들다는 것.

'경상감영 경관복원을 위한 우정사업본부 대구우체국의 조속한 이전 철거를 촉구하는 시민모임'은 이달 6일 성명을 내고 "현재 외삼문(관풍루)-중삼문-선화당으로 이어지는 기본 축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대구우체국 건물이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 너무 왜소하고 초라해 경상감영의 경관을 크게 훼손할 것으로 보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구시 역시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경북지방우정청과 이전 협의를 진행한 바 있다. 시 문화예술정책과 관계자는 "이전을 하면 대체 부지를 마련해야 한다. 우체국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중·남구 내 일정 면적 이상 부지를 물색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정우태기자 wtae@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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