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11013010001579

영남일보TV

[정재완의 디자인 생각] 대구에서 디자이너가 멋지게 살아가려면…

2021-10-15

"내가 서있는 땅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 눈과 귀를 기울여 보자"

2021101301000401200015792
유지영 감독의 영화 '수성못'에는 오리배가 등장한다. 그 안에서 이리저리 맴도는 오리배와 매표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재수생은 경계를 벗어나기 힘든 지방 청년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집 근처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다람쥐가 살았다. 다람쥐는 작은 철창 안에서 길러지고 있었는데 볼에 음식을 잔뜩 저장하는 익살스러운 모습을 보기 위해 아이와 나는 땅콩이며 잣 등을 챙겨갔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철창도 다람쥐도 사라졌다. 다람쥐가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유를 찾았는지, 철창 안에서 짧은 생을 마쳤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미안했다.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그동안 얼마나 갑갑하고 힘들었을지를 느꼈던 것이다. 유지영 감독의 영화 '수성못'에는 오리배가 등장한다. 영화 속 낭만적인 못 풍경은 산으로 둘러싸인 대구의 분지 지형을 은유하는 듯하다. 그 안에서 이리저리 맴도는 오리배와 매표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재수생은 경계를 벗어나기 힘든 지방 청년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디자이너가 협업해야 할 문화예술 인프라·흥미로운 프로젝트 수도권 집중
기업 클라이언트 없는 대구, 관공서·지자체 의존…청년 품어주지 못하는 한계"

"KTX로 두 시간도 안 걸리는 서울디자인 담론, 대구에 적용시키기엔 무리
사람과 세상관계서 출발하는 인문학적 관점, 삶의 역사속에서 디자인 존재"


대학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더 많은 기회와 자유로움을 찾고 싶어 한다. 학생들에게 직접 물어보니 그들은 대구를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회를 얻지 못했고 다시 한번 꿈(?)을 이루기 위해 지방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열심히 스펙을 쌓아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도시를 떠나야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현재를 벗어나기 위해 쏟아붓는 노력들이 눈물겹다.

이미지
한글을 뒤늦게 배운 칠곡 할머니들의 삐뚤삐뚤 정성스럽게 쓴 글씨로 손글씨 폰트를 만들었다.


나 역시 작은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을 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자아를 펼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얻으며 성장했다. 그런 경험의 결과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만약 내가 태어난 도시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일을 찾았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를 보다 객관화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자란 유년시절의 도시를 벗어났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그저 도피가 아니라 세상을 넓게 그리고 보다 유연하게 바라보도록 만들어줬다.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싶은 학생들이 대구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디자이너가 함께 협업해야 할 기업의 본사와 연구소, 문화예술의 인프라, 혁신을 추구하는 클라이언트는 대게 서울에 몰려 있다. 트렌드를 반영하는 새로운 기획과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그곳에 몰려 있다 보니 재미난 일이 많은데 '재미난' 일은 '좋은' 일자리와 어느 정도 동의어다. 물론 대구에도 많은 디자이너가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재미난 일'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다. 지방도시의 디자이너들은 관공서·지자체 지원사업 등의 일을 수주받아서 서비스해주는 일이 대부분이다. 현장의 디자이너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관공서의 일이라는 게 쉽지 않다. 다소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조직의 특성을 반영하듯 디자인 프로세스와 의사 결정 방식 등이 진취적이거나 혁신적이기 어렵다. 또 디자인을 진흥시킨다는 목적으로 예산을 집행하는 기관이 일을 매칭해 주는데 정작 클라이언트인 중소기업이 디자인에 대해 갖는 태도에는 절박함이 없다. 그래서 보고서를 무난하게 제출하는 정도의 디자인 외주능력을 갖추는 '최적화된' 디자인회사가 길러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대구처럼 기업 클라이언트가 없는 도시에서 관공서나 지자체의 수혈에 의존하다 보면 디자인이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이 크다. 서로 이해해주고 편의를 봐주며 점점 느슨해져 가는 협업의 관계가 지속할수록 상황은 악화된다. 무엇보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청년 인재가 지방도시를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도시가 그들을 품어주지 못하는 현실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지방도시에서 디자인 교육자이자 북디자이너로서 일을 하면서 경험하는 한계는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되며 여전히 혼란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와중에 나는 대구에서 디자인의 가능성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발버둥을 치고 있다. 이곳에도 디자이너가 살아가고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서울 중심의 디자인 권력에 균열을 내고 싶은 작은 바람이 있기도 하다. 변화는 언제나 미세한 균열에서 시작된다. 현실은 다소 우울하지만 가능성도 생각해보자. 4차 산업혁명이니 신성장동력이니 하는 구호 아래 지방도시의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은 훌륭한 정책가의 역할로 두기로 하고 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대구 디자인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고 싶다.

먼저 대구의 디자인을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구의 디자인 쓸모와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려면 기존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디자인 정의는 모두 버리는 편이 좋겠다. 왜냐하면 대개의 디자인 담론은 자본과 인구가 밀집된 서울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이 모두를 대변하듯 말하지만 (심지어 한국의 디자인을 말하면서) 특정 지역인 서울이라는 지리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심각한 오류를 지니고 있다. 서울 중심의 디자인 담론은 비행기로 몇 시간씩 이동해야 하는 뉴욕·런던·도쿄 등 대도시와는 공유할 수 있을지 몰라도 KTX로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오갈 수 있는 대구와는 그 사정이 너무 다르다. 서울의 디자인 담론을 대구에 적용시키려고 하면 당장 무리가 따른다. 지방도시가 서울을 닮아가려고 아무리 애를 써봤자 불가능할뿐더러 허무하고 부질없는 짓이다. 어쩌면 서울이라는 벽을 뛰어넘으려고 몰두하기보다는 그것을 애초에 벽으로 보지 않으려는 마음가짐도 좋겠다. 서울의 디자인이 존재하듯, 대구의 디자인도 존재한다고 믿으면 된다.

2021101301000401200015791

지역의 정체성은 다른 곳과의 차이에서 만들어진다. 차이는 사람, 지리, 자연, 기후, 역사, 문화 등에 기인한다. 디자인도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까운 주변을 유심히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디자인의 필요와 쓸모와 실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에서 일어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에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인문학적으로 디자인을 생각하자는 말이다. 대개 인문학적 디자인이라고 하면 잘나가는 인문학자들을 초청해서 심포지엄을 열고 토론을 하는 것으로 퉁친다. 그럴싸한 인문학 용어를 남발하며 그것을 디자인에 억지스럽게 갖다 붙이는 짓이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지 뻔히 알면서 그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우리의 뻔뻔함과 무능력을 반성하자.

인문학은 사람과 세상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생활 인문학을 실천하는 '칠곡 인문학 마을'이 떠오른다. 뒤늦게 한글을 배운 칠곡 할머니들이 시를 쓰고, 시집을 펴냈다. 할머니들이 삐뚤삐뚤 정성스럽게 쓴 글씨로 손글씨 폰트를 만들어서 배포했다. 초기부터 인문학 마을 사업을 기획하고 이끄는 이창원(인디공오삼)은 "강의실에 앉아서 배우는 인문학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오랜 삶 속에서 이미 존재하는 행복을 발견하는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인문학 정신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나는 대구의 디자인도 그 실체가 삶의 역사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이 정확한 진단이나 올바른 처방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우리의 현실을 솔직하게 드러내서 함께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보자는 부탁 정도라고 받아주면 좋겠다. 아픔은 혼자 감추지 말고 주위에 말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야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대구에서 디자이너가 멋지게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함께 궁리하자는 말이다. 가까운 주변에서는 대구의 디자인도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듯 젊은 디자이너들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대구의 디자인이 좀 더 가시화되어서 '재미난' 일이 많아진다면 젊은 청년인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yeongnam/public_html/mobile/view.php on line 399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