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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의 시와 함께] 찰스 부코스키 / '참호전'

2022-05-16

그들은 둘 다

열여덟 살이고, 결혼했고,

빨간 신발을 신고,

금발에

날씬하다.

그리고 재즈, 클래식, 로큰롤

컨트리, 모던

닥치는 대로 틀어 재낀다

시끄러운 것이면 죄다.


찰스 부코스키 '참호전'


최근 몇 년간 재즈만 들었다. 이건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하지만 마음은 늘 재즈였다. 아트 블래키의 '모아닝', 큐티스 퓰러의 '더 오프너', 그란트 그린의 '아이들 모멘트', 벤 웹스트의 '소울 빌리'처럼 재즈는 시끄럽다. 소음의 장벽을 뚫고 들어서면 재즈가 들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 재즈는 들리는 게 아니라 만져지고 보인다고 해야겠다.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오감이 동원되어야 하니까. 왜 소음인가 하는 문제는 왜 재즈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재즈가 처음부터 소음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소음과 소음 사이에 재즈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뉴욕의 시인 찰스 부코스키가 느낀 소음은 재즈에 대한 일차적 시선이긴 하지만 어디서나 재즈는 소음의 한가운데 있다. 재즈의 영혼을 열면 재즈라는 소음은 멀어지고 선율이 다가오리라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만 믿는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재즈를 같이 들을 때, 재즈는 무엇이지, 누구나 고개를 갸웃거린다. 소음과 관조는 재즈의 운명이다. 그 소음을 통과하는 방법은 당연히 재즈 속에 있다. 영혼의 일부가 시끄럽고 생이 소란스럽듯 재즈도 시끄럽다. 영혼과 생에 근접하는 방법은 재즈에게도 통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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