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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우광훈의 장정일 傳] (1) 시인 장정일 씨를 둘러싼 모험…조용한 아웃사이더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시집

2022-05-20

대학 동아리서 장정일 작품 소개받아
'인생 걸어볼 무언가 발견했다' 확신
생애 처음 詩 쓰며 그와의 인연 시작

2005년 여름, 서울역 2층에 위치한 베이커리 파리크라상이었을 것이다. 장정일 형은 흰색 머그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나에게 논픽션을 하나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세계 유명 작가들은 자기를 대표하는 논픽션을 하나씩 갖고 있다며, 좋은 소재가 떠오르면 무조건 스토리만을 생각하는 편협한 소설가가 아니라 그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장르를 찾아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구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역사와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난 한참을 망설이다, '나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장정일에 관한 논픽션을 하나 써보고 싶다'고 답했다. 물론, 그 당시 형은 가벼운 농담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형 앞에선 항상 진지한 녀석이었으므로 이 말을 항상 가슴에 담고 살았다. 형이 책을 읽으면 매번 독서일기를 쓰듯, 난 형을 만나면 매일 장정일 일기를 쓰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형이 들려준 보물 같은 조언들을 내 습작노트에 꼭꼭 담아두고 싶었다. 일방적인 사랑과 주관적인 해석으로 인해 불편한 오해가 생길지라도 내가 보고 겪은 형의 모습을 나만의 감성과 문체로 솔직담백하게 담아내고 싶었다. 이 글은 그 시절에 대한 조그마한 삽화와도 같은 이야기다.

장정일_사진
시인 장정일

시간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교육대 2학년. 난 여전히 단체생활과는 거리가 먼 녀석이었다. 물론 회양목이란 꽤 괜찮은 동아리에 속해있었지만 그 안에서의 활동은 참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따라서 난 그 단체 속 개개인과도 쉽게 융화되지 못했다.

그래 솔직히 고백건대, 나는 밀랍으로 봉해진 정육면체 속으로 꿀을 나르기엔 턱없이 게을렀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단체가 강요하는 구호나 단어는 나에겐 거친 폭력의 일부분으로 인식될 뿐이었으며, 그런 관계로 인파가 몰려드는 축제가 벌어질 때면 난 한낱 외곽에서 서성대는 아웃사이더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렇게 '조용한 소년'이라 불리며 미로와도 같은 동굴 속을 헤매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나, 영희, 상철이 이렇게 셋이 모여 시를 쓰고 합평하는 모임이야. 너도 관심 있으면 들어와도 돼."

현숙이었을 것이다.

문학동인 <비상구>….

솔직히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보다 '셋'이란 숫자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셋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비상구에 가입해 문학이란 낯선 향기에 매료되어 가고 있던 중, 영희로부터 장정일씨의 시집을 소개받았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민음사' '서울에서 보낸 3주일/청하'…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그의 시는 분명 국정교과서에 등장하는 시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문득, '아, 저 시인을 만나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아니 '내 인생을 걸어볼 만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시 한 편이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시는 '진짜'였고, 난 이제 그 '진짜'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 생각은 확신으로, 다시 운명으로 바뀌었다. 난 곧장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썼다. 내가 쓴 첫 시(詩)였다.

'시인 장정일 씨를 둘러싼 모험'

이상하다 시인 장씨. 그는 영남우유를 그냥 마시지 못한다. 딩동! 오늘도 어김없이 13일자 영남우유는 현관 앞에 도착하고. 장씨, 온다. 어? 오늘은 이상한 장씨가 온다. 미니스커트에 한 손엔 칼을 들었다. 무서워요, 장씨∼ 그래! 기다렸다. 흐, 흐, 13일자 영남우유.

장씨, 영남우유를 천천히 든다. 그리고 접시를 돌리듯 빙글빙글 돌린다. 갑자기 포장지를 핥는다. 영남우유 간지럽다, 간지러워. 장 氏, 긁는다. 두드린다. 비튼다. 때린다. 밟는다. 짓뭉갠다. 살, 살려쥬∼우, 장씨! 결국 찌그러진 연∼낭우유. 미친 듯이 한번 피씩 웃는다. 하지만 장씨, 이게 아니라는 듯 좀 더 과격해진 장씨. 눈에 핏줄 선 장씨. 이노옴! 하며 옆에 놓인 칼을 집어 든다. 위급해진 영남우유. 깜짝, 놀란다. 에구머니나! 저 쟈식, 저 변태같은 쨔식이∼ 그러나, 이미 늦었다, 영남우유. 퍽! 장씨, 힘주어 찌른다. 뱃속을 깊숙이 가른다. 으∼아∼악! 이어지는 순서는, M.B.C. 영남우유 피 난다? 하얀, 허연, 아니 시허연, 피가 퐁! 퐁! 퐁! 솟아오른다. 오, 온몸이 다 뒤틀린다.

그러자 하얗게 피범벅 된 장씨. 엉뚱하게도 운다. 아냐, 정말 이게 아냐! 장씨, 엉, 엉, 운다. 뭐가 서러운지, 뭐가 아닌지, 그냥 장씨… 길고 낮은 시간 속을 지나 자줏빛 노을이 온 몸을 물들일 때까지 엉엉엉 운다…. 울기만 한다. 이때 비참한 모습으로 승천하는 13일자 영남우유. 마지막으로 본다. 쓴다.

장씨. 그래 장씨는, 13일자 영남우유를 그냥 마시지 못하고, 흔들고, 돌리고, 핥고, 두드리고, 빨고, 긁고, 비틀고, 때리고, 밟고, 찌르고, 가르고, 그러다 결국 죽여 버리는. 아니, 그것도 부족해 밤새워 14일자 영남우유를 기다리는 장씨는, 1970년 산 너희들, 눈부시도록 투명하고 한없이 가벼운 삶에 길들여진, 때론 사슴처럼 나약한 너희들의 안개다, 바다다, 해골이다, 시집(詩集)이다, 무덤이다.
우광훈 <소설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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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훈 소설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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