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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문화산책] '연꽃의 영혼' 보존하기

2022-05-23

김준현_시인_5_6월문화산책
김준현<시인·평론가>

작년 가을까지 살았던 아파트 단지는 대학 캠퍼스의 테크노파크와 밀접해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다국적의 사람들을 많이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가 제법 걷고 달리는 게 익숙해진 때여서 우리는 유모차를 밀고 근처 공원과 놀이터로 산책을 나가곤 했다. 거기서 인도네시아, 인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다양한 곳에서 온 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여성들이었다. 조금 다른 피부색과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한국의 아이들과 특별히 국적이나 언어의 경계 없이 잘 어울려 놀았다. 푸른 초원 위에 양들을 풀어놓고 쉬는 목동처럼, 적당한 경계의 시선으로 아이들과 이어진 채, 엄마들은 쉬고 있었다. '그들의 문화권에서 남자란 어떤 존재일까?' 생각하면서 나는 늘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반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KBBY와 인권위에서 일했고 외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아내는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대하는 게 낯설지 않은 편이어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육아'와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도 있었으니까. 거기서 만난 한 여성은 가난한 유학생 신분의 남편과 함께 이곳에 와서 홀로 감당하는 세 아이 육아 그리고 생활고를 스스럼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아내는 그녀와 연락처를 교환해 남자아이가 입을 만한 옷가지들, 조카가 깨끗하게 입었던 옷들을 잘 세탁해 전해준 적도 있다. 고마움의 표시로 그녀는 대추로 만든 전통과자를 주었다.

1968년 베트남 출생의 캐나다 작가 킴 투이의 소설 '루'는 사이공에서 말레이시아 난민 수용소를 거쳐 캐나다의 퀘백에 정착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루(ru)'는 베트남어로 '자장가'란 뜻, 프랑스어로는 '실개천' '(눈물, 피, 돈의) 흐름'이란 뜻이다. 두 언어 사이에서, 베트남의 역사를 짊어진 한 여성의 담담한 고백은 소수자의 이야기, 소수점 뒤에서 반올림되지 못하는 존재의 이야기, 낮고 여린 실개천처럼 흐르는 목소리다. 며칠밖에 살지 못하는 '연꽃의 영혼'이 찻잎 속에서 보존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로부터, 나는 누군가에게는 완전히 낯선 이곳, 이방인으로서의 현실에서 자신의 영혼을 보존하는 존재와 현실, 젖은 대추과자의 이미지를 발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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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현 시인·평론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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