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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칼럼] 불구대천 원수도 아닌데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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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논설위원

불구대천(不俱戴天). '하늘을 같이(俱) 머리에 이지(戴) 못한다'라는 뜻이다. 같은 하늘 아래에 함께 있어선 안 될 원수(怨讐) 사이를 일컫는다. 예로부터 부모형제의 원수는 '불구대천지원수' 또는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하늘에 사무치도록 한이 맺히게 한 원수)'라고 불렀다. 침략과 저항으로 점철된 동서고금의 역사는 불구대천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사 인간사, 쌔고 쌘 게 불구대천의 사연 아니던가.

'엘 클라시코(El Clasico)'. 스페인 프로축구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일컫는다. '고전의 승부'로 풀이돼 자못 고상하게 읽힌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두 팀은 불구대천의 앙숙이다. 둘이 맞붙으면 우리나라 축구 마니아들은 '불구대천 더비'라고 한다. 역사적 이유가 있다. 바르셀로나가 15세기 스페인 통일 전까지 언어·문화가 다른 카탈루냐 지방의 핵심 도시였기 때문이다. 과거 스페인 파시스트 독재자인 프랑코 총통은 수도인 마드리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차별·탄압했다. 반골 기질이 강한 카탈루냐와 그 구심체 역할을 한 FC 바르셀로나엔 유달리 가혹했다. 아직도 두 지역 간 감정의 골은 메울 수 없을 만큼 깊다.

미국 프로야구에서도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는 오랜 세월 불구대천 원수였다. 레드삭스가 베이브 루스를 헐값에 양키스에 팔아버린 게 화근이었다. 레드삭스는 2004년 우승하기 전까지 무려 86년간 챔피언 반지를 단 한 번도 끼지 못했다. 이를 '밤비노의 저주'라고 불렀다. 이 둘이 포스트시즌에서 맞붙을 경우 우리로 치면 '불구대천 시리즈'로 통했다.

어디 스포츠뿐이겠나. 작금 대한민국 여야 정치판도 영락없는 '불구대천판'이다. 원 구성을 둘러싼 극한 대치 끝에 정상화의 문은 열렸지만 여전히 죽기 살기식 전쟁터다. 삿대질·비아냥·고성으로 가득하다. 거대 야당의 안중에 여당은 없다. 자신들 입맛에 맞는 법안을 일방 통과시키기 바쁘다. 21대보다도 더 사나운 약육강식판이다. 갈등과 대립을 통한 승자독식만을 탐할 뿐이다. 같은 진영 안에서도 불구대천이 없을라고.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이들의 모골송연한 '총질'이 볼썽사납다. '오징어게임'이 따로 없다. 무서운 화약고 같은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이 심산하다. 웃기게도,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 난 여야도 특권 유지·세비 인상 등 공동의 이익을 위해선 귀신같이 한마음이 된다. 이러니 뽑아주고 후회한다는 말이 국민들 입에서 나오는 거다.

세상에 영원한 불구대천은 없는 법. 먼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 철천지원수 사이인 오나라와 월나라도 한 배를 타지 않았나(吳越同舟). 한때 서로가 원수였던 미국과 베트남도 근년에 이르러 파트너십을 맺었다. 미국은 또 영원한 앙숙인 러시아와도 국제우주정거장 운영만큼은 머리를 맞댄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폴란드인 학살'로 원수가 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의 침공 이후 역사적 앙금을 털어내고 손을 잡았다. 북유럽 국가에선 집권당 소속 국가수반이 몇 날 며칠 야당 대표와 함께 나토 군사훈련을 참관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야당도 엄연히 국가를 이끌어 나갈 존재'라는 정치철학이 뿌리내렸다. 여야가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다. 이 모두 안보와 국익의 이해관계가 맞으면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다는 사례다. 지금 한국은 민생과 안보에서 그 어느 때보다 중차대한 시기다. 여야가 서로 손을 못 잡을 이유가 없다.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닌데.이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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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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