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빠르게 변하는데
동료에 '순혈 갑질'한 MBC
비공채 투명인간 취급하는
못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순혈주의 폐해가 조직 망쳐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
최근 MBC를 둘러싼 갈등이 뜨겁다. 나는 싸우는 양쪽 모두에게 MBC 기자 이기주의 '기자유감'(2023)이란 책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이기주는 누구인가? 2022년 11월 대통령 윤석열을 향해 "MBC가 뭘 악의적으로 했다는 거죠? 뭐가 악의적이에요?"라고 외친 기자다. 논란이 되긴 했지만, 윤 정권에 비판적인 MBC 지지자들에겐 '살아 있는, 의롭고 용감한 기자'로 유명하다.
처음엔 언론학자로서 언론인들이 쓴 책은 다 읽어야 한다는 직업윤리와 사명감으로 읽게 되었지만, 이 책에서 뜻밖의 재미와 의미를 발견했다. 무엇보다도 모두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도 언급하길 꺼리는 MBC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해 애정 어린 접근을 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 문제는 무엇인가? '순혈주의'라고 하는 조직문화다. 이는 MBC 내외의 갈등을 증폭시킨 동시에 해소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2년 MBC에서 사장 김재철 등에 대한 인적쇄신을 요구하면서 일어난 '170일 파업'은 MBC 조직 구성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파업이 일어나자 MBC 경영진은 보도 부문에서 대체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30명 안팎의 이른바 '시용기자'를 선발했다. 1년 간 시험적으로 고용한 뒤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조건이었다.
파업 이후 입사한 '경력기자'들도 있었는데, 기존 파업 기자들과 시용기자·경력기자 간의 갈등은 두고두고 MBC의 아픈 상처로 남게 된다. 그 갈등은 수년간 지속되었고, 2017년 5월 '오마이뉴스'에 실린 <"회식 따로, 야식도 고민"…MBC의 찢어진 '속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따르면, "MBC는 2012년 파업 이후 5년째 '공채와 경력·시용' '파업 참가자와 불참자' '1노조와 반노조' 등 내부 구성원 간 분열로 내홍을 겪어왔다."
그런 내홍으로 인해 2013년 2월 경력기자로 MBC에 입사한 이기주가 2015년 어느 날 당한 봉변을 살펴보자. MBC에 입사한 뒤 2년 동안 한 번도 교류가 없던 한 선배 기자가 잠깐 보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기주에게 MBC에서 생활하는 법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다고 한다.
"공채 기자들이 너를 왜 싫어한다고 생각하냐? 너는 김재철이 데려온 첩의 자식이야. 비유하자면 그래. 내 말 맞잖아."
"첩의 자식이라고요?"
"네가 만약 본처의 자식이라면 김재철이라는 아버지가 첩의 자식을 집에 들였을 때 기분이 좋겠냐. 첩의 자식답게 행동해. 너를 마음에 안 들어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평소 "공채 기자들의 상처를 비집고 들어온 경력 기자로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이기주는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선배 기자는 며칠 뒤 자정 무렵, 밤늦은 술자리에 이기주를 불러 술을 한 잔 받으라더니 술은 따르지 않고 갑자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나.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그는 씩씩거리며 "김재철이 데려온 첩의 자식!"이라고 소리쳤고, 술자리에 같이 있던 다른 기자는 그의 주먹질을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기주는 '기자유감'에서 "그 선배 기자는 아직도 나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고, 나는 그가 왜 주먹까지 휘둘렀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첩의 자식' 사건 이후 언제부터인가 MBC 뉴스에서 직장 갑질이나 태움을 비판하는 보도가 나갈 때면 속쓰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했지만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가 던지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거세게 비난받아 마땅한 역대 정권들은 놔두고 왜 피해자인 을(乙)들끼리 서로 증오하면서 권력의 음모와 장단에 맞춰 놀아나느냐는 항변이 아니었을까? 이기주는 다음과 같이 썼다.
"멀쩡히 일하던 기자가 정권 교체 5년마다 회사 밖이나 창고로 발령이 나고 기존 업무에서 배제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 MBC다. 자신이 밀려났을 때는 불법이라며 길길이 날뛰던 기자들은 정권이 교체돼 반대쪽 사람들이 밀려날 때는 그 불법을 모른 척하고 외면한다. 그러니 모두가 나만 억울하고 나만 피해자다. 피해자는 가득한데, 자신이 가해자라고 고해성사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곳도 MBC다. 처음에는 피해자였지만 다시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였다가 또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하는 악순환도 끊이지 않았다."
MBC는 공채 기수를 중히 여기는 순혈주의가 매우 강한 조직으로 유명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첩의 자식' 운운했던 기자와 그의 폭력을 구경만 했던 기자는 '순혈주의 중독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보기엔 이기주는 MBC의 그런 찬란한 전통을 훼손한 악한이었을 게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잘 나가는 엘리트 조직일수록 이런 순혈주의가 만연해 있다. 정식 공채 기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못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순혈주의의 폐해가 조직을 망친다는 게 충분히 입증되면서 사회 전반의 대세는 순혈주의 파괴로 나아가고 있다. 순혈주의는 무엇보다도 다양성을 죽임으로써 창의성과 혁신을 원천봉쇄한다. 배타적 보수성을 키워 조직의 목적 수행을 훼손하면서 불공정과 불의의 온상이 될 수 있다. 2011년 왜 법조일원화가 도입되었겠는가? 사법연수원을 졸업해 곧장 판사로 임용되던 방식이 폐쇄적 순혈주의를 낳는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경찰대가 지난해에 왜 편입의 문을 열었겠는가? 경찰대 순혈주의에 대한 경찰 내 원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일부 4학년 학생들이 편입생에 대해 '순혈 갑질'을 한 게 논란이 되면서 경찰대 폐교 요구가 다시 고개를 들기도 했다. 재계를 보라. 글로벌 시장에서 잘 나가는 대기업일수록 경영진 구성에서 '순혈주의 파괴' 바람이 거세게 분 지 오래다.
세상이 그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MBC에선 어쩌자고 그런 시대착오적인 순혈주의에 집착하면서 일부 동료 사원들에 대해 못된 갑질을 자행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기수를 만들어내는 정기적 공채 선발 시스템을 개선하면서, 적어도 공채 기수의 사조직화는 막아야 한다. 순혈주의는 독선의 온상이기도 하다는 걸 잊지 말자. 이기주를 때린 선배 기자는 뒤늦게나마 꼭 사과하는 게 좋겠다.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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