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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서화가 문징명이 1538년에 그린 '고산유수멱지음(高山流水覓知音)'. |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통하는 우정
백아의 거문고 연주와 관련된 知音
'백아절현' 고사 역시 지음서 비롯돼
고독한 심사·지음 얻기의 어려움 담은
고운 '추야우중'·율곡 '고산구곡가'
中 문인·서화가 작품 소재가 되기도
◆백아와 종자기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고운 최치원(857~?)의 한시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내용도 어렵지 않고 좋은 작품이어서 원문을 암기했던 대표적 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허균의 '성수시화' 등에서 가장 빼어난 시로 꼽은 작품이다. 당나라에 유학 가서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벼슬을 한 후 신라로 돌아왔으나, 신분의 한계 등으로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고 뜻도 펼치지 못하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여기에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나온다. '세로소지음(世路少知音)'이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을 알아주는 지기가 없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노래하고 있다. 지음은 마음이 서로 잘 통하는 친한 벗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런 뜻으로 널리 쓰이는 '지음'이지만, 원래는 거문고 연주와 관련된 고사에서 비롯됐다. 그 주인공은 백아와 종자기다. '지음' 고사는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 '여씨춘추(呂氏春秋)' '설원(設苑)' 등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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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에 유백아(兪伯牙)와 종자기(鍾子期)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총기가 남달랐던 백아는 이름난 거문고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거문고 연주 실력이 매우 뛰어나게 되었다. 거문고(중국 칠현금)의 달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거문고 연주를 칭찬하는 사람은 많아도 곡조에 담긴 자신의 감흥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훗날 진(晉)나라의 대부(大夫)가 된 백아는 군주의 명에 따라 초나라의 사신으로 길을 가던 중, 강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밤이 되자 바람이 잦아들고 휘영청 밝은 달이 구름 사이로 유유히 흘렀다. 달빛이 쏟아지는 강물을 바라보던 백아는 문득 정경에 취한 듯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연주가 끝나자 강가에서 누군가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나무꾼이 자신의 연주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꾼을 본 백아는 그를 위해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백아가 높은 산의 기운과 감흥을 표현하자 나무꾼은 "훌륭합니다. 웅장한 곡조가 마치 구름 위로 솟아난 태산을 떠올리게 하는 군요"라고 했다. 파도를 생각하고 연주할 때는 "대단하군요. 도도하게 일렁이는 선율이 마치 장강이 넘실대며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라고 감탄했다. 이때 연주했던 곡이 '고산유수(高山流水)'로 알려졌는데, 이 고산유수는 멋진 거문고 곡조를 의미하고, 지음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자신이 연주하는 심상을 처음으로 정확히 짚어주는 사람을 만난 백아는 흥분하며 "당신이 나의 지음(知音)이구려"라고 말했다. 의형제를 맺은 두 사람은 다음 해 중추일 무렵, 그곳에서 다시 만나 연주를 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듬해 중추일이 되어 백아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종자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아는 인근 마을 사람을 통해 종자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이 알려준 종자기의 무덤을 찾아간 그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이윽고 백아는 거문고를 꺼내 들고 종자기를 생각하며 '고산유수'를 그리워하는 곡조를 연주했다. 연주를 마치고는 "세상에 지음이 없으니 앞으로 누가 나의 연주를 알아줄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패검을 꺼내 거문고의 줄을 자르고 몸체도 부숴버렸다. 부서진 거문고 조각을 종자기의 제단에 바친 백아는 그 후로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이들의 우정은 다양한 문학작품에 담겼다. 당나라 이백은 '종자기가 없는 세상에는 지음도 없구나'라고 읊었고, 북송의 구양수는 '그대의 연주는 백아의 곡조이니, 예로부터 지음은 구하기 어렵다 했다'라고 했다.
지음은 일반적 우정에 비해 한 차원 더 높은 정신적 경지에서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지음을 만나기가 어렵다(知音難覓)'라고 탄식하곤 하는 것이다. 생사를 함께한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백아와 종자기가 그랬듯이,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라는 말도 지음과 연결된다.
남효온(1454~1592)의 문집에 '동봉이 무현금을 구하기에 작은 종을 그려 창두를 시켜 보내고, 절구 두 수를 부쳤다'라는 제목의 시 두 편이 실려 있다. 동봉(東峰)은 김시습(1435~1493)의 호다. 절구 중 하나인 아래 시에도 지음을 얻기 어려운, 고독한 처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인적 없는 오솔길에 나무들은 으슥하고/ 송월(松月)이 처마 엿볼 때 흰 대숲 깊으리라/ 거문고에 줄이 없어 듣는 이 적으리니/ 옛 오동은 잠 못 드는 마음에 빗겼으리'.
세 번째 구절에서 무현금, 즉 줄 없는 거문고를 거론하며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독한 심사, 세상과 소통하기 어려운 외로운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에 그 고독한 심사가 잘 나타나고 있다. 옛 오동은 '오동은 천 년을 늙어도 늘 아름다운 곡조를 감추고 있다(桐千年恒藏曲)'라는 오동이다. 즉 거문고를 상징한다. 잠 못 드는 새벽 그의 마음에 빗겨 있는 오동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의 마음이다. 무현금을 구하는 김시습의 고독한 심사를 알고 남효온이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율곡 이이(1536~1584)가 읊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에서도 지음을 얻기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팔곡(八曲) '금탄(琴灘)'을 이렇게 읊었다.
'팔곡은 어디인가 거문고 소리 들리는 듯한 여울에 달이 밝다/ 빼어난 거문고로 서너 곡조 탔지만/ 옛 가락을 알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 즐기노라'.
지음은 그림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했다. 중국의 역대 문인이나 서화가들은 '고산유수우지음(高山流水遇知音)' '고산유수멱지음(高山流水覓知音)' '휴금멱지음(携琴覓知音)' '휴금방지음(携琴訪知音)' 등을 주제로 한 서화작품을 적지 않게 남겼다.
명나라 서화가 문징명(文徵明)의 1538년 작 '고산유수멱지음(高山流水覓知音)' 작품을 남겼는데, 이 그림에 써놓은 화제다.
'거문고 끼고 자리에 앉으니 흰 구름 깊은데/ 늙은 나무와 늘어진 넝쿨 땅을 덮어 그늘 졌네/ 서로 산과 물이 외지다고 못마땅해 하지 마라/ 시끄러운 저자에는 지음이 별로 없으니'.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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