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희정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2025년 개봉작 영화 '승부'는 바둑계의 두 전설적 인물, 조훈현과 이창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김형주 감독이 연출하고, 김형주와 윤종빈이 각본을 맡았으며, 이병헌이 조훈현 역을, 유아인이 이창호 역을 열연했다. 이 영화는 바둑이라는 고도의 전략 게임을 통해 승부의 본질을 깊이 성찰한다. 바둑은 361개의 점 위에서 벌어지는 무언의 전쟁이지만, 단순한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방식과 윤리적 태도를 드러내는 은유적 장치다.
조훈현은 한국 최초의 9단이자 세계 최초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바둑의 전설이다. 1995년에는 공식 대국 1천승을 기록하며 '바둑의 신'으로 불렸다. 이창호는 14세에 KBS 바둑왕전에서 최연소 우승, 16세에 최연소 세계 챔피언에 오른 '천재 소년'이었다.
영화는 조훈현이 세계 바둑의 정점에 선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이며 바둑은 '기세가 8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창호는 바둑의 기술뿐 아니라 승부 세계의 냉혹함과 아름다움을 체득해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두 사람의 관계는 변화한다. 이창호는 조훈현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마침내 공식 대국에서 스승을 꺾는다. 모두가 조훈현의 승리를 예상했던 순간, 이창호는 냉정한 계산력과 침착한 끝내기로 승부의 흐름을 바꾼다.
이 승부는 두 사람의 '이기는 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조훈현의 바둑은 전투적이며 직관에 능하고, 상대를 흔들고 압박하며 승리를 이끈다. 그는 일종의 전략가로, 바둑판을 전장처럼 지배했다. 반면 이창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정함과 철저한 계산에 기반한 전략으로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한다.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고 짓누르기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결국 그 자리가 전체 판을 움직이는 중심이 되게 만든다. 그의 수는 조급하지 않고, 그 안에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균형이 있다. 그는 상대를 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기는 데 몰두한다. 불확실성과 혼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마음가짐은,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apatheia, 평정심)'와 닮아 있다.
이창호가 추구하는 승리의 방식은 바둑 십계명의 첫 번째 원칙인 '부득탐승(不得貪勝)'에 근거한다. '승리를 탐하지 않는다'는 이 원칙은, 역설적으로 진정한 승리를 위해서는 오히려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이창호는 조훈현의 가르침을 흡수하되, 그것을 자신만의 철학으로 재구성하며 새로운 '이기는 방법'을 창조해낸다. 이창호의 바둑에는 '복기'라는 자기 성찰의 과정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승리한 대국의 복기를 통해 '이기는 습관'을, 패배한 대국의 복기를 통해 '이기는 준비'를 다진다. 타고난 재능보다 끈기와 노력,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 극복의 자세가 그의 승리 철학의 핵심이다.
(조훈현) 어제 대국 봤다. 여전히 도통 싸울 생각을 않더구나.
(이창호)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으니까요. 굳이 위험하게 전투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조훈현) 싸움이 겁나서 피하는 건 아니고?
(이창호) 그럴리가요. 제가 누구 제잔데요.
이 짧은 대화는 자기다움을 지키며 이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시킨다. 대부분의 승리는 외부의 평가, 경쟁의 결과로 결정되지만, 이창호는 바둑판 위에서 '자기 기준의 승리' '관계의 완성'으로서의 승리를 구현한다.
2025년 6월 4일,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간이 열렸다.
이제는 더 이상 무리수와 자충수로 시간이 낭비되지 않고, 묘수와 강수의 적절한 조화로 새로운 희망의 진짜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이희정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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