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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취안저우(泉州) <상>

2025-06-26 11:00
취안저우 구시가지 모습. 멀리 로터리에 시계탑이 보이는데, 근대 개항기의 흔적이다.

취안저우 구시가지 모습. 멀리 로터리에 시계탑이 보이는데, 근대 개항기의 흔적이다.

비자 면제로 중국과의 왕래가 다시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취안저우라는 도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표적인 우롱차 철관음(鐵觀音)의 생산지로, 미식가라면 너무 향이 좋아 스님도 담을 넘었다는 불도장(佛跳牆)의 도시로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갸우뚱하면 미중 군사 패권 충돌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금문도가 바로 앞에 있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대만 근처네요'라면서 자기만의 위치정보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취안저우는 푸젠성(福建省)의 항구도시이다. 남쪽에는 난징조약으로 처음 개항했던 다섯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샤먼(廈門)이 있고, 북쪽에는 푸젠성의 성도 푸저우(福州)가 있으며, 동쪽 바다에 대만령 금문도와 마주하고 있다. 인천공항에서 샤먼까지 직항편이 있어서 교통은 나쁘지 않다. 대구공항에서 상하이를 경유하여 고속철로 이동해도 무난하다.


취안저우는 지금 중국에서 핫한 도시이다. 2021년에 '취안저우: 송원(宋元) 시대 세계 상업 중심지(Quanzhou: Emporium of the World in Song-Yuan China)'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안(西安)과 함께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의 기점이기 때문이다. '일대일로'는 중국의 육상 및 해상 기반의 경제 벨트 구축 정책을 말한다. 시안이 육상 경제 벨트의 기점이라면 취안저우는 해상 경제 벨트의 기점이다.


취안저우는 오래 전부터 국제 무역도시였다. 유네스코에서 인정했듯이 취안저우는 송원시대 세계 제일의 항구이자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다. 물론 취안저우의 도시 역사는 주진(周秦)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吳)나라 때인 260년에 지금의 펑저우진(豊州鎭)에 행정 관청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서진(西晉) 말기 전란에 휩싸인 중원의 사족들이 대거 이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도시가 흥성하게 되었다.


취안저우 해외교통사박물관 정원에 진열된 석각 유물들. 국제도시로서의 포용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종교 유물이 전시돼 있다.

취안저우 해외교통사박물관 정원에 진열된 석각 유물들. 국제도시로서의 포용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종교 유물이 전시돼 있다.

취안저우는 11세기 송(宋)나라 때부터 외국과 본격적인 무역을 위한 항구로 발전한다. 이를 위해 외국과의 무역을 관리하는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고, 유럽에는 '자이툰(Zaitu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동북쪽에는 고려의 벽란도, 동남쪽에는 말라카, 남서쪽으로는 인도와 아랍 등 40여 개의 항구와 교역하였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서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항구와 맞먹는 '동방 제일 무역항'이라 평하였다. 취안저우만 입구 금채산(金釵山) 위에 우뚝 서 있는 불탑 형태의 육승탑(六勝塔)은 모스크의 미나렛처럼 국제무역선을 위한 등대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취안저우는 예부터 우리나라와도 교류가 활발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유학생, 상인, 승려 등이 집단 거주한 신라촌(新羅村), 고려촌(高麗村)도 있었고, 우리나라 무역선이 드나든 고려항(高麗港)도 있었다. 고려항은 고려의 벽란도를 오가던 무역선이 정박했던 항구인데, 지금은 시장으로 변했고 지명도 쿠이샤강(奎霞港)으로 바뀌었다. 고려인이 먹었다는 고려채(高麗菜)는 여전히 식당 메뉴판에 보이고, 한반도에서 수입한 신라삼(新羅蔘)의 명성도 전해온다. 고려를 오간 중국 상인도 취안저우 출신이 제일 많았다. 100년간 4천5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나라 때 창건된 복청사(福淸寺)는 당시 취안저우 자사 왕연빈(王延彬)이 신라 스님 현눌선사(玄訥禪師)를 위해 지은 사찰이다. 선사는 이곳에서 30년 동안 불법을 전수하며 취안저우 지역민의 존경을 받았다.


취안저우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이나 아프리카 등지와의 교류도 활발하여 유라시아 출신의 이주민들도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했다. 실제로 로마, 이집트,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 스리랑카, 자바 등 세계 각지와 무역했던 유적과 유물이 지금도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 현재 취안저우의 상주인구가 878만여 명(2020년)인데, 그 가운데 외국인이 204만 명이라고 한다.


돛을 올리고 출항하는 배의 모습을 형상화한 취안저우 해외교통사박물관(海外交通史博物館) 모습.

돛을 올리고 출항하는 배의 모습을 형상화한 취안저우 해외교통사박물관(海外交通史博物館) 모습.

또 취안저우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華僑)의 본향이기도 하다. 이곳에 본관을 둔 화교가 750만명으로, 홍콩과 마카오에 거주하는 76만명을 포함하여 전 세계 129개 국가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타이완에도 이곳이 본향인 사람이 약 900만명이나 되는데, 이는 타이완 전체 인구의 반 가까운 숫자이다. 외국인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곳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로 진출한 것이다. 이러한 도시 성격 역시 포용도시이자 국제도시로서의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취안저우는 서로 다른 문화 요소들이 공존하면서 새로운 융합 문화가 번성하였다. 특히 도시의 포용적 면목을 보여주는 여러 역사 유적이 도시 곳곳에 가득하다. 그러한 증거를 모아 놓은 곳이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취안저우 해외교통사박물관(海外交通史博物館)'이다.


이곳은 중국 해양사의 전모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박물관 외형은 돛을 올리고 출항하는 큰 배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높은 벽면에 새겨진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의 기록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13, 14세기 이곳을 방문했던 두 여행가는 이곳을 온갖 물산이 모이는 세계에서 제일 큰 항구라고 기록했다.


해외교통사박물관의 '취안저우 종교석각진열관'. 상설전시관으로 다양한 종교 석각 유물을 전시한다.

해외교통사박물관의 '취안저우 종교석각진열관'. 상설전시관으로 다양한 종교 석각 유물을 전시한다.

기독교와 토착 종교의 융합을 보여주는 원나라 시기 유물인 고딕 아치 모양의 묘지석(Gothic Arched Tomb Stone).

기독교와 토착 종교의 융합을 보여주는 원나라 시기 유물인 고딕 아치 모양의 묘지석(Gothic Arched Tomb Stone).

상설전시관은 취안저우의 해양 실크로드를 다룬 '해외교통역사전시관', 다양한 종교 석각 유물을 전시한 '종교석각관', 중국의 해양사를 다룬 '중국 주선(舟船) 세계', 생활 풍속을 담은 '민속문화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종교석각관은 이슬람교를 비롯하여 기독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등 국제도시로서의 포용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종교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슬람 관련 석각은 물론이고 마니교, 힌두교, 심지어 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인 경교(景敎)의 금석문과 묘비명이 허다하다. 국제 무역항답게 전 세계의 각종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유적박물관 같았다.


특히 눈을 사로잡은 것은 기독교와 토착 종교의 융합을 보여주는 원나라 시기 '고딕 아치 모양의 묘지석(Gothic Arched Tomb Stone)'이었다. 양손으로 십자가를 받쳐 든 부처가 네 개의 천사 날개를 달고, 성덕대왕 신종의 비천상을 연상케 하는 구름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석각이었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신기한 조합 앞에서 뒤통수를 크게 한번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잠재해 있었던 종교에 대한 고정 관념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절대 화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동서양 종교의 융합이 이렇게 버젓하다. 사람을 중심에 놓고 보면 하나 이상할 것이 없는데, 나는 그동안 무슨 완고함에 함몰되어 있었던가. '서방 천사(天使)와 중국 비천(飛天)'이라는 설명은 기독교의 천사나 인도 신화의 비천 모두 하늘과 사람을 매개하는 소통과 교류의 상징으로 읽혔다. 그리고 이러한 두 상징이 하나의 모습으로 일체화된 것이 포용적이고 융합적인 국제도시 취안저우의 진면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석각 유물. 오른쪽 상단의 십자가가 시리아식 '자이툰십자가'이다.

기독교 석각 유물. 오른쪽 상단의 십자가가 시리아식 '자이툰십자가'이다.

부처가 들고 있는 독특한 모양의 십자가를 '자이툰(취안저우) 십자가'라 부른다. 취안저우에서 자주 발굴되기 때문이다.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시리아식 십자가이다. 시안(西安)의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에는 당나라 때 기독교 전파를 증명하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있다. '대진(大秦)'은 로마를 말하고, 경교(景敎)는 당나라 때 황제의 허락을 받아 공식적으로 포교 활동을 했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말한다. 따라서 16세기 후반 마테오리치가 예수회 가톨릭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전에 중국에서 유행했던 기독교는 바로 이 경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현재 중국에는 기독교도가 많지 않지만 취안저우 시내에 기독교 천남당과 고딕양식의 화항 천주교당 등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취안저우의 종교적 다양성은 마니교 유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취안저우의 화표산(華表山) 기슭에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마니교 건물이라는 초암사(草庵寺)가 있다. 마니교는 3세기경에 페르시아의 선지자 마니(Mani)가 창시한 융합 종교이다. 6~7세기경에 중국에 들어온 마니교는 당나라 때 종교 탄압사건이었던 '회창폐불(會昌廢佛)' 이후 중국화된 명교(明敎)로 다시 등장하여 점점 불교와 도교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마니가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가 환생한 것으로 여겼으며, 서쪽으로 가서는 부처로 환생했다고 믿는다. 초암사는 12세기경 이러한 명교의 신도들이 건립했고, 1339년에 재건축되었다. 같은 해에 마니광불석상(摩尼光佛石像)이라 부르는 마니의 석상도 세웠다. 명교의 교리는 '청정광명대력지혜(淸淨光明大力知慧)'라는 여덟 글자로 요약되는데, 해외교통사박물관에는 '대력(大力)'이라는 명교 석각이 전시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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