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7월 뉴오타니호텔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는 이건희 회장. <삼성 제공>
이건희 회장은 유럽시장의 현황을 알기 위해 출장길에 올랐다. 1993년 6월의 일이다. 비행기 1등석 제일 앞자리에 이건희 회장 부부가 앉았고 뒤에는 수행팀장인 손욱과 팀원 4명이 자리 잡았다. 비행기 고도에 오르자 손욱 팀장은 이건희에게 후쿠다 타미오의 56쪽짜리 보고서를 올렸다.
삼성전자의 디자인센터에 근무하던 일본인 산업디자인 고문 후쿠다는 삼성의 문제점을 사업본부장에게 여러 차례 보고서를 올렸으나 번번히 묵살됐다. 그는 삼성을 떠나면서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며 손욱 수행팀장에게 보고서를 건넨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후쿠다 타미오 고문을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어로 된 그 문서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나갔다.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에 근무하던 일본인 산업디자인 고문 후쿠다 타미오. <삼성 제공>
◆후쿠다의 지적
그가 지적한 내용은 이렇다. '현대가 디자인의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삼성 사람들은 패션 디자인만 알 뿐 공업 디자인, 상품 디자인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상품을 생산할 때 아직도 상품기획서가 없는 회사가 삼성이다.' '3천명이 세탁기를 만들고 300명이 세탁기 뚜껑을 칼로 도려내어 간신히 뚜껑이 닫히게 만들고 있다.' 즉 금형 디자인이 잘못돼 조립 단계에서 뚜껑이 닫히지 않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작업 공구를 쓰고 나서 제자리에 두지 않고 내팽겨쳐서 다음 사람이 그 공구를 찾으러 공장 안을 헤매고 다닌다.' 후쿠다 보고서를 다 읽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건희는 비서실장, 본부장, 사장까지 몽땅 자신에게 거짓말로 보고를 해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무려 25년간 삼성에 몸담고 있어서 삼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후쿠다씨의 보고서를 보니, 삼성에 대해 자신이 너무 모르고 있다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희는 그 문서를 읽고 나서 손욱 팀장에게 전달한 후 수행팀 모두 읽어보고 대책을 얘기하라고 했다.
◆소니도 비슷한 병폐
이런 경우는 일본의 소니에도 있었다. 소니는 일본 최고의 가전 기업이다. 당연히 일본의 우수한 인재들이 입사한다. 소니의 회장인 모리타 아키오가 어느 날 평사원과의 회식 자리를 가졌다. 어느 평사원이 말하기를 '소니에 입사하기를 열망해서 들어왔는데 막상 근무를 해보니까 자신이 선택한 회사는 소니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상사였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말하자면 자신의 의견이 번번히 상사에 의해 묵살돼 자신의 아이디어는 상사가 받아들여주지 않는 한 빛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는 소니가 자신의 회사가 아니라 상사들의 회사라고 느껴 평생 일하고 싶지 않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모리타 회장은 그 후 사보에 전직(轉職)란을 만들어 자신이 가고 싶은 부서에 전직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일본 삼성전자의 디자인센터에 근무하던 일본인 고문 후쿠다씨도 상사에 의해 번번히 아이디어를 차단하던 소니의 평사원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기대 이하의 변화
막상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 이건희의 눈에 비친 삼성은 수준 이하였다. 이건희는 회장 취임 초기에 일본인 기술고문들에게 삼성에 와서 근무하면서 느낀 점을 써달라고 얘기했다. 거기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지적됐다.
①개인은 다 훌륭하지만, 연구한 것이 전달되지 않고 있다. ②현재 자기들이 제일이라는 자만에 빠져 창조적 도전을 하지 않는다. ③한국 기업은 미리 대비하지 않고 문제가 터진 후에 돈을 쓴다. ④삼성의 관리자들은 너무 급하고 실적과 결과만 평가한다. ⑤부자 나라 일본의 근로자는 살아남기 위해 일벌레처럼 일하고 연구소엔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데 삼성은 안 그렇다. ⑥다행히 한국에는 젊은 파워가 있다. 이 젊은이들을 잘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경영자의 책임이다.
이건희는 기술고문들이 제시한 문제점을 정리한 후 과장급 이상의 사원들에게 읽히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삼성과 파나소닉 제품의 비교
1988년에 취임하면서 '제2의 창업'을 선언했지만, '제2의 창업'이 문제가 아니라 그때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91년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이건희 회장은 일본의 마쓰시다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파나소닉의 VTR 생산라인을 둘러본 후 이건희 회장은 파나소닉의 VTR 신제품을 하나 구해서 그걸 분해해 보았다.
분해해 본 결과 마쓰시다, 즉 내셔날의 VTR 제품은 화질, 선명도 및 화면 해상도, 스타트 시간 등이 삼성전자의 제품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품질은 우수한데 부품 수는 오히려 삼성 제품보다 30%가 적다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그 즉시 이수빈 그룹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일 간의 기술 격차가 이렇게 큰 상황에서 향후 유통시장 개방 시 소니, 마쓰시다 제품이 상륙할 경우 그에 대한 대응책이 마련돼 있는가를 물었다. 비서실 입장에선 별다른 대응책이 없었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지시한 신경영 선언 당시의 모습. <삼성 제공>
◆대대적으로 보고 받아
이건희는 '지난 1981년부터 그동안 계열사 및 비서실에 지시한 내용을 모두 취합하고 그 지시사항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이행되었는지 각 사별로 종합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그룹 비서실에서 파악한 1981년 이후의 이건희 회장 지시사항은 무려 284페이지나 됐다.
비서실에서는 각 계열사에 지시사항 이행 여부 확인을 위한 인원을 각 기획실에서 3~5명씩 차출했다. 그들은 호암생활관에서 합숙하면서 지시사항 이행 여부를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회장의 지시사항이 이행되지 않고 상당 부분 실종됐다는 것이 확인됐다. 한국에서는 관리를 제일 잘한다는 삼성그룹도 그 당시엔 이 정도였다. 이건희의 실망도 컸다. 그는 이런 실망감을 '영감(이병철 선대회장)에게 속았다'고까지 표현하면서 삼성의 병폐에 한탄을 금치 못했다.
1991년 12월5일의 사장단 회의에서는 이런 내용도 나왔다. '기술을 강조했더니 효율은 무시한 채 사람 머릿수와 연구개발비를 무턱대고 늘리고 개발과제도 지나치게 방만하게 펼쳐 외형적이고 전시적인 기술 중시에 치우치고 있다.'
이건희 회장 자신이 엔지니어 이상으로 기술을 잘 알다 보니 지시사항은 쌓이고 기술부서에서는 그 지시사항을 이행하느라 태스크포스팀을 자꾸 신설하게 되고, 회장의 지시사항을 이행한답시고 그럴 듯하게 겉포장만 흉내내는 일들이 빈발해지자 사장단을 질책한 것이다.
연구원 수는 많이 늘어났는데도 막상 진행되는 일은 별로 없고, 새로 만든 기술도 실용성이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비용 부담만 늘어나고, 회사 자체의 수익 구조가 나빠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1990년에는 2천500억원의 순익을 기록했던 삼성이 1991년도에는 매출은 늘어나는데도 순익은 감소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1990년, 1991년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건희가 회장으로 취임한 1988년 이후 계속 반복되어 오고 있는 현상이었다.
게다가 사원들의 의식구조도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시대는 국제화로 가고 있는데, 사원들의 의식은 아직도 국내시장 1등에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컨대 사원을 해외에 파견할 때도 유능한 사원을 시장 잠재력이 큰 후진국에 파견해야 하는데 실제로 유능한 사원은 이미 시장의 기반이 다 잡힌 선진국으로 파견되고, 후진국에는 오히려 실력이 떨어지는 사원이 파견되는 등 인사의 난맥상도 있었다.
결국 이건희는 그 해 말 창업 이래 최대의 규모라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무려 217명을 임원으로 승진·발령했는데, 생산기술 부문에서 38명, 해외 부문이 17명으로 기술 개발과 국제화에 역점을 둔 인사였다. 이병철 선대회장과는 다른 경영방식이었다. 그 결과 신경영 선언이 있었던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매출액은 약 30배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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