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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11] ‘태극단’ 이끈 이상호, 열여덟에 비밀결사 결성

2025-11-05 17:38

서상교·김상길 등과 함께 태극단 조직

내부자 밀고로 결성 2주여 만해 와해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45년 12월 9일 만19세 나이로 세상 떠나


대구상업학교의 비밀 항일결사체인 태극단의 단장 이상호 열사. 영남일보DB

대구상업학교의 비밀 항일결사체인 '태극단'의 단장 이상호 열사. 영남일보DB

이상호 선생(앞줄 왼쪽에서 여섯번째)의 대구상업학교 졸업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상호 선생(앞줄 왼쪽에서 여섯번째)의 대구상업학교 졸업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광복 80주년을 맞아 영남일보는 '내 이름은 투사' 시리즈를 통해 대구를 빛낸 독립운동가 12명을 월별로 소개하고 있다. 11월의 인물은 일제강점기 말기 대구에서 학생 비밀결사 조직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한 이상호(1926~1945) 단장이다. 친구들과 조국 독립을 위해 열아홉 나이에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 일제에 맞섰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스무 살 생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일제의 폭압 속, 학생들이 만든 비밀결사


이상호는 1926년 2월19일 경북도 대구부 봉산정(현 대구 중구 봉산동)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정의감이 유달리 강했다. 1938년 대구 덕산국민학교를 거쳐 이듬해 4월 대구상업학교에 입학한 그는 일제 차별과 억압이 교실 안까지 스며드는 현실에 분노했다. 당시 대구상업학교로 부임한 일본인 교장은 일본인 학생에게 유리하도록 품행점수를 50%나 배정했다. 그 결과 조선인 학생들은 학과 성적이 아무리 우수해도 1등을 할 수 없었다. 이에 학교에서 수재로 꼽히던 이상호는 17세 무렵 이 부당한 평가에 항의하며 일본어 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했고 결국 낙제를 당했다.


1930년대 후반 일제 감시와 탄압은 한층 더 거세졌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됐다. 법원·학교 등 공공장소에선 우리말 사용까지 금지됐다. 1940년엔 창씨개명이 강요돼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꿔야 했다. 1942년 5월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고이소 구니아키는 "조선은 황국의 일부이며, 불온한 생각을 품은 자는 단호히 처단하겠다"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이같은 폭압적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상호는 더는 침묵할 수 없었다.


1942년 5월, 열일곱 살의 이상호는 친구 서상교·김상길 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심 아래 김정진, 이원현, 윤삼룡 등 16~18세 청년 26명이 뜻을 함께했다. 이상호와 동지들은 단순한 학생 모임이 아니라 체계적인 항일조직을 구상했다. 조직별로 단장에 이상호, 관방국장에 김상길, 체육국장에 서상교, 과학국장에 이준윤, 비서장에 김정진을 각각 선임하기로 결정했다. 또, 국민학교 상급생과 중학교 저학년 학생을 차세대 단원으로 육성하기 위한 특수조직 '건아대(健兒隊)'도 별도 두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1년여 준비 끝에 1943년 5월9일 대구 앞산 약수터에서 결성식을 열었다. 조직 이름은 태극기를 상징으로 한 '태극단(太極團)'으로 정했다. 약칭으론 'T.K.D'라 칭했다. 강령엔 '조선 민족의 이상적인 단결과 능률로 조선 독립을 도모하며, 나아가 인류의 평화와 자유, 평등을 실현한다'는 목표가 담겼다.


불행히도 이들의 결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성한 지 불과 2주 만에 내부자의 밀고로 일제 탄압을 받았다. 단장 이상호는 1943년 5월23일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됐다. 모진 고문에도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 "모두 혼자서 한 일"이라며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상호를 고문하는 것만으론 조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찰은 그의 집까지 수색해 숨겨둔 문건을 찾아냈다. 이 문건이 빌미가 돼 체포된 지 이틀만에 서상교·김상길 등 9명이 잇달아 검거됐다. 나머지 단원들도 줄줄이 붙잡혀 차례로 심문대에 올랐다.


당시 대구경찰서로 끌려 온 서상교는 훗날 증언을 통해 "당시 대구경찰서 2층 안에서 이상호를 볼 수 있었다. 경찰에 얻어 맞은 이상호가 기어 나오는 게 아직도 생생하다"며 "경찰은 나 역시 몽둥이로 때리고, 주리를 틀었다. 공모자가 더 없냐며 고문을 계속했는데, 망치로 손톱을 때리거나 철사 자르는 가위로 손톱을 뽑기도 했다"고 당시 끔찍한 상황을 떠올렸다.



태극단 독립운동 지사들의 형량이 기록된 대구지방법원 수형인 명부. 맨 오른쪽 상단에는 단장 이상호(李相虎) 선생의 이름이 적혀 있다.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제공

태극단 독립운동 지사들의 형량이 기록된 대구지방법원 수형인 명부. 맨 오른쪽 상단에는 단장 이상호(李相虎) 선생의 이름이 적혀 있다.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제공

일제는 1944년 1월19일 이상호를 '대일본제국의 국시(國是)를 반역한 국적(國賊)'으로 몰아세우며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10년을 선고했다. 미성년자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 형량이었다. 혹독한 옥고 끝에 이상호는 1945년 2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미 몸은 만신창이였다. 끝내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한 이상호는 해방을 불과 반년 앞둔 같은 해 12월 9일 만1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상호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영남일보 1945년 12월12일자 지면. 영남일보DB

이상호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영남일보 1945년 12월12일자 지면. 영남일보DB


당시 영남일보도 이상호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다. 영남일보는 1945년 12월12일자 지면을 통해 "병석의 신음 아래 건국 약진의 모습을 학수하던 이상호 군은 동지와 친척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난 9일 혁명의 생을 마감했다. 그 눈물겨운 고별식은 11일 오후 2시, 덕산정 반월당 도로 앞에서 동지·친족·사회 각 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고 이상호의 사망 소식을 보도했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학생 항일 투쟁 단체 태극단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조윤화 기자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학생 항일 투쟁 단체 태극단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조윤화 기자

◆ 태극단의 정신, 기념탑에 새겨지다


정부는 '태극단'의 뜻을 기려 1963년 이상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대구에서도 태극단 정신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대구상원고 총동창회는 2003년 10월 동문들의 성금과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교내에 태극단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세웠다. 대구 학생항일운동의 역사를 알리고, 자유와 독립을 향한 선열들의 뜻을 배우게 하는 상징적 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당시 8m 높이에 달하는 기념탑이 세워졌다. 양쪽 석벽엔 항일정신으로 맞선 태극단원들의 모습이 조각됐다. 기념탑 바침글엔 '태극단학생독립운동은 일제 말기의 유일한 학생독립운동으로, 결사동기가 뚜렷하고 행동지령이 원대하며 그 체계성과 역사적 의의가 크다'는 문장도 새겨졌다.


비록 '태극단'의 일대기는 짧았지만, 10대 학생들이 스스로 항일 활동에 나섰다는 역사적 메시지는 현재까지도 후세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 10대 학생들이 스스로 항일 단체를 꾸린 사실만으로도 대구지역 항일 학생 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평가한다.


충남대 허종 교수(국사학과)는 "태극단은 일제 침략전쟁이 한창 승세를 타던 시기에, 당대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의 승리를 예상하며 협력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학생들이 오히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조선의 독립뿐 아니라 '자유·평등·평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려 한 진취적 이상을 지녔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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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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