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등 당한 어리버리 형사로 컴백
액션·멜러 등 다채로운 스펙트럼
코믹영화 ‘정보원’ 내달 3일 개봉
대기업 사표쓰고 서른살 넘어 데뷔
연기 인생 내 뜻대로 되는 것 아냐
오늘 하루 주어진 일 최선 다할 뿐
내달 3일 개봉하는 코믹액션영화 '정보원'에서 형사 역할로 컴백하는 배우 허성태. <엔에스이엔엠 제공>
내달 3일 개봉하는 코믹액션영화 '정보원'에서 형사 역할로 컴백하는 배우 허성태. <엔에스이엔엠 제공>
"지금 행복합니다.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지금이 제 인생 최고의 날입니다."
영화 '오징어 게임'의 악역 연기로 팬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된 배우 허성태. 그는 한때 대기업 해외영업팀, 기획조정실에서 일한 촉망받던 직장인이었다. 꿈의 직장에서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과 승진의 기회를 과감히 내던지고,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연기 학원 지하 연습실에서 꿈을 향해 도전했다. 죽을 만큼 고생한 보람이 있었던지 최근들어 영화, 드라마, 예능서 '블루칩'으로 주목받고 있다. 다음달 3일 개봉하는 코믹영화 '정보원'에서 후배에게 무시받고 승진에서도 누락된 어리버리 형사 '오남혁'으로 돌아온다.
◆'뉴욕영화제' 개막작 초청
영화 '정보원'은 열정도, 의지도, 수사감각도 잃은 왕년의 에이스 형사 '오남혁'과 정보원 조태봉이 얼떨결에 목숨이 걸린 범죄 사건에 휘말리며 공조하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지난 7월 열린 '뉴욕아시안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받으며 주목받았다.
"뉴욕에서 처음 영화를 봤는데, 현장 반응이 너무 좋은 거예요.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진짜 좋았죠. 그때 '아, 개봉을 좀 서둘러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어요."
그가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언어의 차이를 넘어서 빵빵 터지는 '웃음지점' 이었다.
"사실 우리 영화가 한국적인 정서, 한국식 코미디 코드가 많은데도 현지 관객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웃더라고요. '오징어 게임', '범죄도시' 같은 작품들이 먼저 길을 닦아놓은 덕분에, 이제는 해외 관객들도 한국 영화의 리듬과 정서를 꽤 잘 받아들이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작품에서 허 배우는 액션과 멜러, 코믹까지 다채로운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오징어게임' '카지노' '범죄도시'에서 보여준 조폭의 서늘한 이미지와는 다른 결이다.
"약간은 부족해 보이는 보통사람 '오남혁' 역할이 제 성격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악역 연기를 할 때보다는 훨씬 편했죠. 저랑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디션 심사위원 5명 전원 'OK'
허 배우는 연기자들 사이에서 흔치않은 이력의 소유자다.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대기업 문을 박차고 나와 연기라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장을 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 5명이었는데, 3명만 합격을 줘도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거였거든요. 그때 제 생각은 만약에 딱 3명만 '오케이'를 주고 2명이 반대를 하면, 방송국에 녹화본 다 지워달라고 하고 회사로 돌아가자였어요. 2명이 반대했다는 건 결국 제 연기가 40%는 부족하다는 뜻이니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디션 심사위원 5명 전원이 '오케이'를 줬고, 그는 그 길로 직장에 사표를 제출했다.
"오디션에 합격했어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어요.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도 숙제였죠. 합숙하러 가는 날 막걸리 두병과 통닭 한 마리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배우로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쪽지까지 끼워두었죠. 그때 부모님께서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대기업 근무 경력은 연기를 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철저하게 분석하고, 계획하고, 다음 과정을 미리 준비하는 안정적 체계를 갖춘 것이다.
"저는 제 연기를 보면 항상 오그라들어요. 그래서 일부러 많이 보려고 합니다. 그 오그라드는 걸 견디면서, 뭐가 문제인지 찾으려고 계속 보는 거죠."
◆영화 '아저씨' 500번 본 노력형 연기자
새 작품이 개봉하면, 누구보다 열성적인 모니터링을 하는 것도 그만의 특징이다. 몰래 극장에 들어가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관객 반응을 살피는 것.
"보통 제 장면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는 건 다섯 번쯤 보고 나서예요. 그 전까지는 관객 반응만 보느라 정신이 없어요. 어떤 장면에서 웃는지, 어디서 지루해 하는지, 어디서 숨을 같이 참는지 그런 것들요."
배우로서 가장 큰 자양분이 된 영화는 원빈 주연의 '아저씨'다.
"거의 노래처럼 틀어놓고 살았어요. 특히 마지막 액션씬, 원빈 배우가 소미를 구하러 들어가는 그 장면은 한 500번은 본 것 같고요. 영화 전체도 워낙 많이 봐서, 틀어놓으면 대사를 다 따라할 수 있을 정도예요."
그가 그 장면에 유독 꽂혔던 건 액션의 쾌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영화가 제게는 '소중한 존재를 건드렸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저한테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었거든요. 백혈병으로 소중한 가족을 떠나보내고, 새벽기도까지 다니며 기도했지만 결국 가족을 잃고는 상처받았죠.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흔들리는지, 그 감정에 공감이 많이 갔던 것 같아요."
오디션에 합격했지만 작품에 참여할 기회는 그리 쉽게 오지 않았다. 다시 춥고 배고픈 날들이 쭉 이어졌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마음만은 편안했다.
"단역 오디션만 엑셀로 정리해 보니 185번인가 되더라고요. 떨어진 횟수까지요. 그걸 하나하나 적으면서 '그래, 아직은 과정이다'라고 마음을 붙들었죠."
◆"배우인생 계획하지 않는다"
"저는 방송에 나가서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지면, 누군가가 찾아와서 캐스팅 제안을 할 줄 알았어요. 정말 철없는 생각이었죠. 현실은 아무도 안 찾아줬어요. 그래서 프로필 다시 만들고, 재수강생처럼 다시 학원 다니고, 또 프로필 돌리고, 다음 달 월세 걱정하고…. 그런 과정들이 진짜 쉽지 않거든요."
늦깍이 배우 지망생 허성태에게 마침내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 세계적 히트를 기록한 '오징어게임'에서 장덕수 역할로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선명한 기억을 남겼다.
"이미지가 강하게 박힌다는 건 관객들이 나를 기억한다는 뜻이잖아요. 그건 배우에게 정말 큰 선물이죠. 그 작품 덕분에 많은 분들이 저를 알게 되었고, 이후에 선한 역할, 로맨스 있는 작품도 자연스럽게 따라왔으니까요."
직장인 시절 주어진 업무는 중장기 사업계획을 짜는 것이었지만, 배우 인생만큼은 "계획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회사 다닐 때는 5년, 10년 계획 세우는 일을 밥먹듯 했어요. 근데 그걸 해봤자, 그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더 그래요. 내가 언제 어떤 역할을 할지, 어느 순간 어떤 감독을 만날지,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배우를 시작하고 나서는 딱 하나만 생각해요. '오늘 하루 주어진 촬영, 오늘 하루 주어진 장면에 최선을 다하자.' 몇 년 뒤에 내가 어떤 배우가 돼 있을지, 누굴 롤모델로 삼을지, 그런 건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게 오히려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부산 출신인 그는 연기 인생의 첫 출발지가 '대구'라는 의외의 사실도 덧붙였다.
"첫 장편 영화 데뷔가 대구였어요. 대구 출신 감독님이 만든 독립영화였고, 계명대 출신 친구들이랑 작업했죠. 계명대 캠퍼스와 건물이 예뻤던 기억이 나요. 홍기준 배우랑 같이 형사·범죄자 역할로 출연했는데, 제게는 '대구가 제 영화의 시작점'이었죠"
내달 3일 개봉하는 코믹액션영화 '정보원' <엔에스이엔엠 제공>
■ 영화 정보원은
영화 '정보원'은 '해운대' '마이웨이' 등의 현장편집을 맡은 김석 감독의 입봉작이다. 베테랑 감독의 잘 짜여진 완숙함보다는 신예 감독의 신선한 감각이 두드러진다.
쓰라린 수사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왕년의 에이스 형사 오남혁과 정보원 조태봉의 어딘가 어설프고 예측 불가한 활약상이 버라이어티하게 펼쳐진다.
기존 범죄액션물이 가진 무겁고 하드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어리버리한 허성태의 매력과 숭숭 뚫린 공조체계가 웃음을 안긴다. 여기에 오남혁 형사와 후배 여형사와의 러브라인은 또 하나의 볼거리다.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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