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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 유쾌한 패배

2026-01-29 06:00
송종규 시인

송종규 시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마치 양념처럼, 스쳐가는 커피 향처럼, 문장 사이에 슬쩍슬쩍 피렌체를 개입시키고 있다. 이웃 나라에서 애인을 만나러 피렌체로 간다거나 그곳의 예쁜 카페를 찾아가는 정도로 잠시잠시 피렌체를 등장시킨다.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마 십 년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피렌체, 피렌체, 그 향기로운 이름은 입 안에 남아 있었고 마치, 어릴 적 이불 속에 숨겨놓은 영롱한 유리구슬처럼 잊은 듯 아닌 듯 흔적처럼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지난 여름 한 TV에서 그 피렌체를 다시 만났다. 아, 피렌체! 그 품격 있고 고즈넉한 도시는 단숨에 내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마치 첫사랑처럼. 흥분과 절박함으로 며칠간의 검색 끝에 대학 1학년인 손녀를 꼬드겨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티켓을 예약했다. 솔직히 지금 안 가면 다시는 못 갈 거 같다는 다급함이 등을 떠밀었던 셈이다.


이 즉흥적인 용기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그곳에 도착하고 사흘이 지나지 않아서 깨달았다. 그곳의 여름은 치명적이었고 내리꽂히는 햇살은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폭염으로 인해 도시는 출구도 없이 몽롱하고 흐릿했고, 나는 빨랫감처럼 구겨졌다. 체력도, 나이도, 그곳의 기온도 생각하지 않고 감행한 이 여행의 대가는 온전히 내 몫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찌들고 구겨져서 힘들게 그곳의 골목을 헤맬 때도 나의 예쁜 천사는 볼이 발갛게 익은 채 피렌체의 햇살 아래서, 그 장엄한 시간의 풍경 앞에서 반짝였다.


그 와중에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청춘이란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더구나 현지인처럼 유창한 영어는, 말이 막혀 난처할 때마다 달려와 나를 구원해 주었으니!


떠나기 전 자신만만했던 나의 자존감은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이제까지 뭐하고 살았냐고, 잘난 체하더니 이게 뭐냐고, 자책하기도 했다. 그 애가 한없이 자랑스러웠지만 그 애의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나는 작아지고 있었다.


시론을 쓰면서 몇 번, '시간은 내가 아는 가장 슬프고 아름답고 긴 문장'이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불가사의하지만 위대하고, 아름답고, 슬픈 시간은 경이롭다. 내가 쇠퇴해져 갈 동안 시간은, 강보에 있던 그 애를 이렇게 성장시킨 것이다. 그 애는 폭풍 성장했고 나는 쇠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진할 것이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먼 훗날 다시 피렌체를 떠올릴 때 지난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면, 지금 당장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절박하다면, 나는 또 이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게 될 것이다. 비록 낡고 뒤쳐질지라도 삶의 매 순간은 소중한 것이니까. 시간이라는 긴 강물 위에서 생성되고 쇠락하는, 모든 존재란 소중한 것이니까.


위대하지 않은가, 시간이라는 긴 문장은.


이 거대한 파도 위에서 한 세대와 한 세대가 끌고 밀고 가면서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만들어내고 위대한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삶의 모든 페이지는 시간이 이룩한 두꺼운 책.


그 애, 사랑하는 연우의 아름다운 젊음에게, 유려한 영어 실력에게, 그 빛나는 미모에게, 슬프고 아름답고 긴 문장인 경이로운 시간에게, 나는, 유쾌하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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