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수사지삼층석탑과 2호, 7호, 8호 건물지. 석탑은 9세기 초에 절과 더불어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고려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르막을 한참 올라 고개를 넘으면 가야산 중턱이 넓게 열리는데, 다시 산허리를 타고 몇 굽이를 돌아야 한다. 고려 말 공민왕과 우왕 때의 학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종일 말 타고 덤불 헤치며 왔더니/ 온 산 가득 누각의 문 구름에 맞닿아 열렸네./ 들은 지는 오래나 처음 이곳을 찾으니/ 한발 내딛기가 어려워 아홉 번이나 말머리 돌렸네.(제가야산법수사)'라 탄했던 길이다. 아홉 번 말머리를 돌리고 다시 아홉 번 마음을 돌려 비로소 닿은 곳, 먼 산들이 첩첩으로 사라지고 옹골찬 암봉들이 어깨 겯고 내려다보는 자리, 그곳에 법수사 옛 절터가 있다.
발굴지의 가장 중앙에 1호 건물지가 위치한다. 면적이 가장 넓고 기단도 가장 높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와편들로 1차 조사 때 발굴된 것들을 쌓아두었다.
중앙의 1호 건물지 한쪽에는 육중한 부피감의 장대석과 석등대석, 불상대석 등이 산재되어 있다. 연화문이 선명하다.
◆ 법수사 옛 절터
갈무리된 땅이다. 건물지는 선명하고 초석들은 가지런하다. 그리고 넓다. 모두가 누운 가운데 홀로 선 석탑이 작아 보인다. 절터는 2016년 경 발굴조사를 마쳤다고 한다. 1차 발굴조사 결과 1호에서 6호까지 6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2차 발굴조사에서 7호와 8호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발굴지의 가장 중앙에 1호 건물지가 위치한다. 면적이 가장 넓고 기단도 가장 높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쌓여 있는 와편들이다. 무너진 성채 같고, 기원으로 쌓은 조산 같다. 한쪽에는 육중한 부피감의 장대석과 석등대석, 불상대석 등이 산재되어 있다. 어두운 눈에 연화문만이 선명한데, 무언가 다른 망치와 정의 흔적이 있을까 하고 두어 걸음 다가간다. 그리고 상체를 죽 늘려 굽히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카로운 경고음이 발작적으로 터진다.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면 소리를 지르는 모양이다. 매몰차서 서운했지만 소도둑 같은 행색이기는 했다. 웅크린 석물의 옆모습만 먼눈으로 본다. 차갑고 사늘하고 냉정해보이다가도 어쩐지 희망을 알지 못하는 어린 짐승이 떠올라 짠하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주목 불우조'에 '법수사가 가야산 남쪽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중종 때까지는 존재했던 모양이다. 16세기의 문신 묵재 이문건은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성주로 유배를 갔는데, 그때 쓴 일기에 성주에서 해인사로 가는 경로가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법수'라는 지명이 등장하고 '잣나무 밭 가운데 바위에 올라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 숙종 3년인 1677년에 발간된 경산지(京山誌)에 법수사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나온다. '법수사는 가야산 남쪽에 있다.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세간에 전하기로는 아홉 금당, 여덟 종각, 천 칸 당우가 있었으며 석불, 석탑, 석부, 석체가 산허리 사방에 가득하다. 사찰과 암자의 흔적이 백 개에 이르며, 백성들이 그 안에서 농사를 짓는다. 잣나무 밭이 무성하게 둘러싸고 있어 관에서 이익을 취하고 있다.' 번성했던 법수사의 모습이 어뜩 그려진다.
3호, 4호 건물지. 여러 차례 증개축 되었으며 주변으로 담장시설과 배수 시설이 함께 발굴되었다.
◆ 멸망한 나라의 왕자가 머물렀던 큰 절
법수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 '김부대왕'조에 나타난다. 김부대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으로 기사에는 고려에 항복한 이후 왕자들의 애달픈 행방이 간략히 적혀 있다. '태자는 울면서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서 평생 삼베옷을 입고 풀만 먹다가 생애를 마쳤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와 해인사에 있었다고 한다.' 태자는 마의태자다. 그는 월악산 계립령을 넘어 미륵대원지라는 사찰을 지어 지내다가 오대산으로, 인제 갑둔리로, 그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둘째는 덕주공주다. 그녀는 월악산 덕주사에 지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태자와 공주가 북쪽으로 간 것과 달리 막내왕자 김황(金湟)은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법수사에 머물며 해인사에도 드나드는 등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왕자가 머물만한 절이었으니 당시 법수사는 이미 이름 있는 사찰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신라 애장왕 3년인 802년 해인사가 창건된 무렵에 법수사도 개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에도 법수사는 화엄종 사찰로서 그 규모와 명성을 이어 온 듯하다. 12세기 초에 건립된 합천 '반야사지'의 '원경왕사비'에는 고려 예종이 법수사를 화엄종 4대 왕사인 원경낙진의 복을 비는 향화소로 삼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해인사 비로자나불의 복장유물 중에서 1156년에 법수사의 승려 자행(資行)이 간행한 '범자다라니(梵字陀羅尼)가 확인되었다. 이는 12세기에도 법수사가 왕사의 복을 비는 사찰이자 불교 경전을 간행할 만큼의 위상을 가진 큰 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1972년에 이 절터에서 고려시대 1129년 신흥사(新興寺) 주지 혜관(慧觀)이 기록한 기문현판이 출토되었는데, 그 내용이 대각국사 의천의 문집 간행과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져 법수사의 사격을 상징하는 유물로 인정되고 있다. 거대한 사찰이 폐사되었는데도 그 정확한 시기와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법수사의 최후가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긴다.
법수사지삼층석탑.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모습으로 상륜부의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폐사 후 400여 년 절터를 지켜온 석탑
법수사지를 처음 거닐었던 때가 근 20여 년 전이다. 그 때는 잡풀 무성한 나대지에 '법수사지삼층석탑'만이 홀로 서 있었다. 지금도 모두가 누운 가운데 홀로 서 있지만 사뭇 다른 느낌이다. 중심에서, 중심을 지키는 병사가 된 것 같다. 삼층석탑은 201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모습으로 상륜부의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으로 창건 시기인 9세기 초에 절과 더불어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석탑은 절터 중앙에서 동쪽으로 조금 치우쳐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원래 자리는 서북방향 5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된다.
절터 아래로 넓게 퍼져 미끄러지는 사하는 백운동 중기(中基)마을이다. 절 중앙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석탑 근처 샛길을 따라 100m 정도 내려가면, 마을 초입 미나리꽝과 다락논 사이에 큰 팽나무가 있고 그 나무줄기와 나란히 당간지주가 서 있었다. 거기서부터 절터 위의 국도너머까지를 본래 사역으로 본다. 현재의 법수사지는 근래의 발굴 조사를 토대로 일부 지역만을 정비해 놓은 것에 불과할 뿐, 본래 규모는 상당하다. 흥망성쇠, 영고성쇠, 물극필반이다. 기억하는 샛길들은 이제 가늠이 안 된다. 무엇보다 날 선 바람이 세다. 당간지주는 팽나무에 새순이 돋고 미나리꽝에 물이 찰랑거릴 즈음으로 기약해야겠다.
글·사진=류혜숙 전문기자 archigoom@yeongnam.com
>>여행정보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해인사IC로 나가 해인사 방향으로 간다. 가야면사무소 지나 야천삼거리에서 우회전해 59번국도를 타고 성주 방면으로 가다면 된다. 가야호텔 닿기 전 도로 왼편에 법수사지가 펼쳐져 있다. 쉼터와 화장실 부근에 주차공간이 작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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