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국 대구문인협회 시분과 부위원장
사료에 의해서도 인간과 술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술은 내 인생에 있어 항상 위성처럼 맴돌았다.
소싯적 시골에 산 적이 있었다.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술 심부름을 시켰다. 양은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에 막걸리 사러 갔다. 어떤 날은 고두밥을 얻어먹곤 했는데, 그러면 씹는 맛이 그냥 밥하고는 달라 기분이 좋았다. 내 삶에 있어 술과 인연을 맺은 첫 번째였다.
대구로 이사를 왔다. 어머니는 집안에 술이 생기면 불로동 외삼촌께 술을 가져다드리도록 심부름을 보냈다. 어떨 때는 병마개가 떼어져 있는 게 있어서 호기심이 났다. 길가에 작은 바위라도 있으면 앉아서 병뚜껑에 조금 부어서 마시곤 했다. 목구멍이 콱 쏘고 곧 머리가 해롱거려지는 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위스키가 아니었을까. 어머니에게 들켜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알코올이 내 목구멍을 통과한 날이었다.
고등학교 때 봄소풍 가서 반 애들과 소주를 마셨다. 고산골이었다. 선생님들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물 마시듯 마셨다. 얼마나 마셨던지 돌아오는 길 맘모스 빵집 근처에서 다 토(吐)하고 말았다. 술을 토했던 맨 처음의 경험이었다.
방학 자율학습 때였다. 짝꿍이 "오후 7시까지 평상복 차림으로 XX동에 있는 모 주점으로 나오라"고 했다. 까까머리에 운동 모자를 눌러쓰고 갔다. 속칭 '니나노집'이었다. 막걸리 한두 잔에 취해선 종업원에게 "누나, 누나" 부르며 젓가락 장단을 배운 첫 번째 술집 출입이었다.
이처럼 사회 진출을 위한 과정을 하나하나 체험하고 나니 어느새 성인 술꾼이 되어 있었다. 대학 시절에 술은 나의 절친이었고, '문청'이란 긴 헛꿈도 꾸게 했다.
기업체에 취업하면서 술은 중요 업무 도구 중 하나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직책상 이른바 술상무라 일컫는 업무도 수행하게 됐다. 사주의 손님이거나 거래 업체의 중요 인물에게는 사주가 손수 접대했다. 나는 항상 그 자리에 수행해 음주 분위기를 이끌고 자리가 끝나면 숙소에 안전하게 모셔다드리는 것이 임무가 되었다. 자연스레 나의 주량이 두주불사(斗酒不辭)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지금도 술 세다 소리 듣는 건 그때의 정신적 단련 탓일 것이다.
지금은 술을 자중한다. 마시지 않으니, 주량도 줄어들었다. 거의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와 마셔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아내는 술을 무척 싫어한다. 어쩌다 술 마신 날엔 정신을 바짝 차린다. 아내를 속이기 위해서다. 아니, 속는 척해주는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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