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60609029068978

영남일보TV

  • [영상] 대구 당선인들의 당찬 출발 알림···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선증 교부식
  • [6·3 스케치] 정치적 위기 때마다 뭉쳤다…선거 막판 서문시장 ‘보수 대결집’

“아버지 예술혼 더 많은 사람에 알리려 사상 최대 회고전 준비했죠”

2026-06-09 18:06

<토크인사이드>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
한국 추상미술 거장 유영국 화백 장남
미공개 15점 포함 178점 대규모 전시
‘유영국 저널’ 발간 등 자료 축적 작업
“미술관 건립, 적절한 기회 오길 기대”

2021년 '이건희 컬렉션'이 대중에게 공개됐을 때 평단에서는 가장 큰 수혜자로 울진 출신의 고(故) 유영국(1916~2002) 화백을 꼽았다.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수많은 컬렉션 중에서도 유영국의 대작을 수집하고 아꼈다는 사실 자체가 독보적 가치를 방증했기 때문이다. 전시장을 압도하는 강렬한 원색과 한국 추상미술의 매력, 여기에 평소 미술 애호가로 알려진 BTS 리더 RM의 전시장 인증샷까지 더해지며 '유영국 바람'이 확산했다. 캔버스를 꽉 채우는 거장의 숨결 뒤에는 평생 아버지가 걸어간 고독한 길을 묵묵히 기록하고 보존한 아들이 있었다. 바로 유영국의 장남,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의 유진(77) 이사장이다. 카이스트 교수로 평생 과학자의 길을 걸었던 그는 정년퇴임 후 아버지가 남긴 거대한 예술적 유산을 널리 알리고 아카이빙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 유영국 화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김은경 기자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 유영국 화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김은경 기자


서울시립미술관은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유영국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역대 최대 규모의 회고전을 오는 10월25일까지 열고 있다. 1964년 첫 개인전을 열 때 공개한 작품을 비롯해 일본 유학 시절과 만년의 절필작까지 모두 모았다. 미공개작 15점을 포함해 강렬한 선과 면이 살아있는 유화 115점, 사진·드로잉 등을 합쳐 모두 178점을 전시 중이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저희 재단이 전시회를 준비한 취지는 명확합니다. 일반인들이 추상미술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죠. 대형 공간을 확보하고 관람료도 무료로 진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몇 번이고 편하게 와서 거장의 호흡을 느끼고 가시라는 뜻이었지요."


전국의 국공립 미술관은 물론, 개인 소장가의 작품까지 한자리에 모으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듯한데.


"혼자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운이 좋았고 도울 분들이 기적처럼 연결됐습니다. 우선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되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던 아버지의 대표작들을 모았습니다. 가장 조심스러운 건 개인 소장가들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들이었습니다. 화랑을 통해 진심을 전했더니 '유영국의 예술을 대중에게 제대로 보여주자'는 취지에 공감해 흔쾌히 작품을 내어주셨습니다. 준비 기간만 꼬박 1년 넘게 걸린 대작업이었습니다."


이번 전시작 중 눈여겨 보았으면 하는 작품이 있다면.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올 때쯤, 벽면에 대각선으로 창문 빗줄기 같은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그림 두 점이 걸려 있을 겁니다. 200호짜리 대작인데, 아버지가 한창 에너지를 뿜어내시던 1960~70년대 작품 중 가장 큰 그림입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는 그토록 커다란 캔버스 천이나 틀을 구하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원래 삼성병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귀한 작품인데, 정말 오랜만에 세상 밖으로 나와 빛을 보게 됐습니다."


전시장에서 아버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감정이 격해질 때가 있을 듯한데.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 거대한 그림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캔버스 너머로 아버지를 대면하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듭니다. 마치 아버지의 숨결이 남아 있는 화실에 단둘이 앉아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랄까요."


지금은 유영국 화백의 작품이 많이 알려졌지만 생전에는 추상미술 자체가 흔치 않았다.


"아버지가 이 그림들을 그리던 1960~7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 사회에는 추상미술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습니다. 심지어 전시장에 찾아온 관람객이나 지인들조차 대놓고 '이게 무슨 그림이냐' '거저 주어도 안 가져가겠다'라며 거친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런 냉대 속에서도 묵묵히 붓을 들었던 작가의 상실감과 외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제는 일반 시민들이 당신의 그림으로 만든 달력을 좋아하고, 색감과 에너지에 감탄하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얻습니다."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 유영국 화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김은경 기자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 유영국 화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김은경 기자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된 지 벌써 23년이 흘렀다. 그동안 재단이 걸어온 길과 성과에 대해 말한다면.


"생전의 아버지는 '내가 언제 어떤 그림을 누구에게 보냈다' 같은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경매 시장을 뒤지고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퍼즐을 맞추듯 아카이브를 했습니다. 또 하나 보람 있는 일은 학술지 '유영국 저널'을 발간해 온 것입니다. 1년에 한 번씩 아버지를 기억하는 친지들의 인터뷰, 평론가들의 엄밀한 비평을 담아내는 전문 학술지입니다."


작가의 작품을 항상 만날 수 있는 '미술관' 건립도 숙제일 듯 하다.


"국가나 지자체가 나서서 공공 미술관을 짓고, 영구히 관리해 주면 좋겠지만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쉽지 않은 듯 합니다. 저희도 과거 아버님의 고향인 울진군과 미술관 건립을 구체적으로 논의했고, 예산까지 확보되는 단계에 이르렀으나 안타깝게도 최종 무산된 경험이 있습니다. 저희가 생각하는 미술관은 비록 공간이 작더라도 큐레이터들이 상주하며 작가의 미학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많지 않더라도 안정적인 기획 예산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관심을 보여준 곳도 있는데, 기준에 부합하는 적절한 기회가 오기를 신중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울진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이 있는지.


"저희 가족은 6·25 전쟁 직후 울진으로 피난을 가 4년 넘게 살았습니다. 집에서 500m만 걸어가면 죽변항이었죠. 아버지는 서울대 교수직까지 내려놓고 오셨는데, 체면 따위는 개의치 않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고군분투했죠. 양조장을 만들어 술을 빚고, 어부가 되어 배를 띄우기도 했어요. 어린 제 눈에 비친 아버지는 참 묘한 분이었습니다. 아침이면 직원이 커다란 바가지에 가득 담아온 독한 소주를 안주도 없이 소금 몇 알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슥 일어나 죽변 해변을 따라 하염없이 걸으셨지요. 방파제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등대 뒤편 대나무 숲을 거닐며 사색에 잠기셨습니다. 특히 죽변 어시장에 들러 갓 잡아 올린 생선들의 파닥거리는 기운과 그 찬란한 색채를 구경할 때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유 화백은 생전에 "산은 내 안에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아들이 해석하는 그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지.


"저는 아버님의 그 말이 '진리는 내 밖에 있는 게 아니니, 외부의 유행에 휩쓸리지 말고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 내면의 답을 구하라'는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외국의 인상파, 추상파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게 아니라, 서양의 기법을 쓰되 그들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예술을 완성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전통이 된다는 믿음이셨지요. 우리나라가 반도체를 수입해 쓰던 나라에서 이제는 '한국형 반도체'로 세계를 제패했듯, 미술도 그렇게 주류 사조를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투지가 있으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화가 유영국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지독하리만치 철저한 '직업 의식'과 '자기 절제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주정 한 번 부리지 않았고, '그림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그 좋아하던 술을 몇 년씩 칼같이 끊어내셨습니다. 무엇보다 과묵했습니다. 1977년부터 심장 질환 등으로 평생 수십 차례 병원을 오가며 사투를 벌이셨는데, 단 한 번도 '아프다' '힘들다' 내색을 안 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전 병원에 7개월간 누워 계실 때, 제가 곁을 지키며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실 말씀이 없으시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보통의 아버지라면 애틋한 유언이라도 남기셨을 텐데, 아버지는 눈을 가만히 감으시더니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없다' 그게 끝이었습니다. 섭섭하기도 했지만, 그게 지극히 아버지다운 면모였습니다. 자신의 고통과 삶의 무게를 온전히 스스로 짊어지고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였지요."



기자 이미지

김은경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생활/문화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